요한

요한

다른 표기 언어 Saint John the Bap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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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유대
사망 미상
국적 성서

요약 요한은 하느님의 최후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으며, 심판에 대비하여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존경한다.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한 뒤 요르단 계곡 저지대에서 예언자로 명성을 얻었다. 여러 제자들을 두고 있었고, 예수도 그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요한을 가장 위대한 마지막 예언자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주요자료에는 4복음서(마태·마르·루가·요한), <사도행전>,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가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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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요한에 관한 자료들
  3. 생애와 사역
  4. 에세네파와 연관되었을 가능성
요한(Saint John the Baptist)
요한(Saint John the Baptist)

개요

하느님의 최후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으며, 심판에 대비하여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존경한다.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한 뒤 요르단 계곡 저지대에서 예언자로 명성을 얻었다. 여러 제자들을 두고 있었고, 예수도 그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요한에 관한 자료들

그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주요자료에는 4복음서(마태·마르·루가·요한), 〈사도행전〉,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Antiquities of the Jews〉가 있다.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이 자료들을 사용할 때는 우선 각 저자들의 익히 알려진 경향들을 알아야 한다. 4복음서들은 모두 요한을 그리스도교 시대의 시작으로 보며, 요한이 예수보다 앞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점과 예수가 요한의 메시지와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는 점(예수가 요한에게 종속되었음을 암시하는 요소들)을 예수가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저자의 신앙과 일치시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마르코의 복음서〉는 예수를 소수 집단에게만 알려진 감추어진 메시아로 묘사하고, 요한을 돌아온 예언자 엘리야,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와야 할' 인물로 묘사하지만, 요한 역시 감추어진 채 그 참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마르 9). 성서학자들이 단순히 'Q'라고만 알려진 초기 예수의 어록 모음집도 이와 비슷하게 세례자 요한을 '장차 올 인물'과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로 묘사하면서도 요한의 예비적인 성격, 즉 예수에 대한 종속성을 강조한다.

마태오와 루가는 이 두 자료들을 발전시킨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요한을 특히 돌아온 엘리야, 즉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로 본다(마태 3). 마태오는 요한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옛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선물에 적대적 태도를 취한 사건으로 묘사한다(루가의 복음서). 루가는 자신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요한을 엘리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선구자로, 예언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연 인물로 묘사한다.

요한과 예수의 유아기에 관한 루가의 이야기는 요한의 옛 제자들이 전해준 듯한 자료를 사용하지만, 반드시 '세례자'(요한) 종파가 작성한 기초 문서를 토대로 삼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이야기는 서로 병행을 이루는 일련의 장면에 따라 예수와 요한의 탄생을 묘사한다.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 잉태, 탄생, 할례, 두 아기에게 인사하고 그들의 장래를 예언하는 찬송, 유아기 등이 그것이다. 요한은 심지어 태중에서도 마리아의 태 속에 있는 예수를 자신의 주(主)로 알아보았다. 〈요한의 복음서〉는 요한을 엘리야에서 그리스도교 설교자의 전형으로 축소시킨다.

그는 대변자에 불과하다. 또한 〈요한의 복음서〉는 예수가 그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실을 생략한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요한의 복음서〉는 당시까지 남아 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 집단에 대한 반론이 담겨 있다고 지적되곤 했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된 〈요한의 복음서〉의 그리스도 이해와 예수가 요한에게 종속되었음을 시사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의 그리스도 이해 사이에 형성된 긴장의 필연적 결론으로서, 이를 인정하기를 바랐던 복음서 기자 요한의 희망 때문에 이같은 경향이 생겼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복음서들은 주로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종교 현상을 헬레니즘 범주에 따라 소개하려고 했고, 로마 제국의 통치에 비우호적인 정치적 요소들은 강조하지 않으려고 했다.

생애와 사역

위에서 말한 각 자료의 성향을 인정한다 해도 요한에 관한 아래의 세부 내용은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

그는 유대 어딘가에서(적어도 530년부터는 그 지역을 엔케렘으로 표기했음) 아비야 계열의 사제 즈가리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엘리사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인 듯함)에게서 태어났다. 성장기를 유대 광야에서 보냈는데, 그곳에는 에세네파(BC 2세기경부터 AD 1세기말까지 존재했던 엄격한 유대교 종파)와 같은 금욕주의 공동체들이 있었고, 개인적인 은수자(隱修者)들이 그들의 이상에 따라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곤 했다.

27~28년 또는 28~29년에 사제가 아닌 예언자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으며, '살림 근처 애논'(지금의 나블루스 근처)에서부터 예리고 동편에 이르는 요르단 계곡 저지대에서 활동했다.

그가 입었던 검소한 낙타 털옷은 예언자들이 전통적으로 입던 옷이었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삶으로써 유대교의 정결법 또는 나지르인(하느님을 섬기기로 특별히 서약한 유대인)의 금욕적인 행위를 보였다. 그는 유대인 사회의 모든 계층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하느님이 진노로 세상을 심판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이 심판을 예비하여, 각자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설교를 했다.

요한의 설교에 담긴 의미와 관련해서 몇 가지 문제들은 계속 논란거리가 되었다. 〈마태오의 복음서〉 3장에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하느님 자신, 인간 메시아, 또는 초월적인 신적 존재를 가리킬 수 있다. 그는 또한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고 말하는데, 이 2번째 세례는 장차 올 분이 집행할 심판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최후의 심판). 요한의 추종자들은 유대교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참회의 금식과 특별한 기도를 했다.

〈루가의 복음서〉 3장에서 요한은 정의와 자비를 윤리적으로 요청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의로워져야 한다.

요한은 과거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측근에 제자들을 두고 있었으나, 세례를 이 집단의 입문의식으로 삼지는 않았다. 세례는 장차 있을 세계 심판을 준비하는 회개를 상징하는 의식(흐르는 물 속에 잠기는)이며, 의로운 생활이 이에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죄사함의 성사(聖事)가 아니었으며, 최종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유대교를 없애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해서 새로운 백성을 만들려는 것도 아니었다. 요한의 세례가 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새로이 민족적 구원을 받는 것을 상징했다는 가설도 옳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느님과 다시 하나가 되고 하늘의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 즉 구원과 거듭남의 성례였다는 주장도 신빙성이 없다. 유대교의 개종자 세례식은 요한의 세례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요한 세례의 기원이 아니다.

요한이 활동한 시대와 장소에서 다른 여러 세례 집단들이 발견되지만, 이러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례들 중 어느 하나가 요한의 세례에 영감을 주었다는 증거는 없다. 에세네파의 입문 세례가 부분적으로 비슷하긴 하지만, 이들이 행한 다른 세례들은 공동체의 정결의식을 유지하는 것과 관계가 깊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대했다기보다는 장차 올 세계 심판을 대망하며 이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령이 장차 불의 강에서 베풀 2번째 '세례'로 상징된다.

에세네파와 연관되었을 가능성

사해두루마리가 발견된 이래 요한의 사역과 그가 부분적으로 신앙훈련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에세네파의 사역 사이에 비슷한 점들이 많다는 데 관심이 쏠려왔다.

둘 다 사제직에 기원을 두었고, 금욕생활을 했으며, 세계의 종말을 열렬히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은 조직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고, 그러한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세 율법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에세네파보다 폭넓은 계층(가난한 사람, 죄인)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요한을 가장 위대한 마지막 예언자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보았다(마르 9, 마태 11, 루가 7). 예수의 사역은 많은 점에서 요한의 사역을 계승 발전한 것이었다.

신적인 '사람의 아들'(Son of Man)을 대망했음직한 요한이 예수를 그러한 인물로 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훗날 예수를 따랐다.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뒤 한참 지나서 갈릴래아와 트랜스요르단 동편 중부지역을 다스리던 헤로데안티파스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것은 요세푸스가 전하는 대로 지루한 도덕 설교 때문도 아니었고, 복음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그가 설교를 통해 정치를 비판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헤로데는 첫째 부인(인근 아랍족 나바테아 왕국의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한 뒤 자신의 이복동생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것은 유대법상 불법행위였다. 요한이 이 결혼을 비판하고 나서자 헤로데는 자신이 다스리던 유대 백성과 반(半)아랍 백성이 연합하여 자기를 반대하는 위기에 직면했음이 분명하다. 그가 요한을 처형한 것은 35~36년 아레타스 왕이 헤로데를 공격하여 승리하기 전이었음이 분명한데, 이 패배는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데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졌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죽었다. 그가 죽은 시기를 아무리 정확하게 추산한다 해도 그것은 예수가 사역하고 죽은 연대에 근거한 것이다. 요한의 추종자들은 그의 시체를 찾아내 장사를 지냈다. 그의 것으로 전해져온 '살림 근처 애논' 인근의 세바스테(원래는 사마리아)에 있는 묘지는 360년부터 그의 묘지로 공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