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다른 표기 언어 와일드 ,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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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4. 10. 16, 아일랜드 더블린
사망 1900. 11. 30, 파리
국적 아일랜드

요약 19세기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영국 유미주의 운동의 대표자로,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등의 희곡작가로 유명하다.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그의 명성은 걸작 희극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1892)·〈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1895)에 의거한 것이다.

그는 19세기말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영국 유미주의 운동의 대표자이다. 동성연애와 연루된 유명한 민사·형사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2년간(1895~97) 복역한 일도 있다. 와일드는 문학에 조예가 깊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 경은 눈과 귀에 관한 일류 외과의였고, 고고학과 민속학, 풍자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에 대한 책을 저술한 석학이었으며, 어머니는 혁신적인 시인이자 켈트족 신화와 민간전승에 조예가 깊은 권위자였다.

와일드는 엔니스킬렌의 포토라 왕립학교를 다닌 후(1864~71), 계속 장학금을 받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대학교 맥덜린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우등으로 학위를 받았다.

4년의 대학시절 그는 점잖은 재사이자 고전학자일 뿐만 아니라, 장시 〈라벤나 Ravenna〉로 1878년 선망의 뉴디게이트상을 수상한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인생에서 예술의 핵심적 중요성을 지적한 존 러스킨, 월터 페이터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심미적 열정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페이터의 주장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그도 "단단한 보석 같은 불꽃을 발하며 늘 타오르라"고 충고한 페이터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 그는 심미적 자세를 취하기를 즐겼으며, 미술품으로 장식된 옥스퍼드대학교의 여러 방들의 분위기와 연결되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아, 나의 푸른 도자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면!"

1880년대초 유미주의가 런던의 문단에 크게 유행하여 일반인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때, 와일드는 사회적·예술적 서클에서 기지와 화려함으로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곧 잡지 〈펀치 Punch〉는 예술에 대한 남성답지 못한 집념을 지닌 유미주의자에 대해 반감을 갖고, 와일드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희극 오페라 〈인내 Patience〉에서 길버트와 설리번은 부분적으로 와일드를 모델로 하여 '육욕에 빠진 시인' 번손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와일드는 유미주의파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시집 Poems〉(1881)을 자비로 발간했는데 그것은 와일드가 앨저논 스윈번,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존 키츠의 충실한 제자임을 보였다.

1882년 그는 더 많은 인기와 갈채를 얻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강연을 하기로 동의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세관에서 "나는 내 천부적인 재능밖에는 신고할 것이 없소"하고 큰소리를 쳤다. 나른한 포즈와 벨벳 재킷, 짧은 바지, 검은 비단양말 등으로 인해 그에 대한 반감이 신문에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나, 그는 12개월 동안 미국인들에게 미와 예술을 사랑하라고 권했으며,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미국의 인상을 강연했다.

1884년 아일랜드의 유명한 변호사의 딸 콘스턴스 로이드와 결혼했고, 1885, 1886년에는 시릴과 비비안이 태어났다.

그동안 와일드는 〈팔 말 가제트 Pall Mall Gazette〉의 평론가로 일했고 그후 〈여성세계 Woman's World〉(1887~89)의 편집장이 되었다. 작가가 되기 위한 견습기에 〈행복한 왕자 외(外)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1888)를 발표했으며, 이 작품은 동화 형식의 낭만적인 알레고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모든 주요작품을 완성·출판했다.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은 1890년 〈리핀코츠 매거진 Lippincott's Magazine〉에 연재되었고, 1891년 개정해 6장을 첨가한 후 출판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고딕 소설의 초자연적 요소와, 프랑스 데카당파 소설이 담고 있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죄의 요소를 결합시켰다. 도리언이 결국 자신의 죄과로 자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은 그 부도덕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와일드는 그 작품의 명백한 도덕적 결말에 관계없이 예술의 초도덕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전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평론집 〈의향 Intentions〉(1891)에서는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티에, 샤를 보들레르, 미국 화가 제임스 맥네일 휘슬러 등의 사상을 차용해 예술에 대한 그의 유미주의적 태도를 재천명했다. 같은 해 단편과 동화 등으로 구성된 2권의 책 〈아서 새빌 경의 범죄 외(外) Lord Arthur Savile's Crime, and Other Stories〉·〈석류의 집 A House of Pomegranates〉 등을 발표하여 그의 탁월한 창의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와일드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르는 풍속 희극이었다.

사회적 음모와 인위적 장치로 갈등을 해결하려 한 프랑스의 '잘 짜여진 극'을 고수하면서, 그는 19세기 영국 연극에 새로운 유형의 희극을 만들기 위해 역설적이고 신랄한 기지를 사용했다. 최초의 성공작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는 이와 같은 기지가 프랑스 연극의 낡은 구조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같은 해 섬뜩한 공포감을 주는 연극 〈살로메 Salomé〉는 그의 말에 의하면, 변태적인 정열의 묘사로써 관중을 전율시키기 위해 프랑스어로 썼고 프랑스의 연극양식대로 구상된 극이었으나, 그 속에 성서의 인물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리허설 중 검열관에 의해 상연금지되고 말았다. 이 희곡은 1893년 출판되었고, 오브리 비어즐리의 유명한 삽화와 함께 1894년 영어판이 발간되었다. 2번째 풍속희극 〈하찮은 여인 A Woman of No Importance〉(1893)을 보고 평론가 윌리엄 아처는 와일드의 연극이 "현대 영국 희곡의 최고의 차원에서 수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1895년초 와일드의 마지막 두 작품 〈이상적인 남편 An Ideal Husband〉·〈진지함의 중요성〉이 잇달아 공연되었다. 최고의 업적인 후자에서 소극(笑劇)의 전통적 요소가 풍자적 경구로 변형되었다. 이 극은 시시해보이나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위선을 가차없이 폭로한 작품이다.

다수의 작품들이 은밀한 죄나 무분별한 행위, 또 그 결과로 야기되는 망신 등을 주요줄거리로 삼고 있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면, 수필 〈거짓말의 파멸 The Decay of Lying〉(1889)에서 주장한 대로, 그는 쾌락의 무모한 추구방식에 접근한 셈이다. 더욱이 1891년에 만난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친밀한 교제는 더글러스의 부친인 퀸즈베리 후작을 몹시 노하게 했다. 드디어 후작에 의해 남색자라는 죄목으로 고소당하게 되자, 그는 앨프레드 더글러스로부터 힘을 얻어 명예훼손으로 후작을 맞고소했다.

그러나 증거가 드러나자 소송을 취하했다. 프랑스로 도피하라고 친구들이 취하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종말을 고할 때가 왔음을 믿을 수 없어 그 충고를 태연스럽게 거절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와일드는 법정에서 재치 있게 증언했지만 배심원은 평결을 내릴 수 없었다. 재심에서 그의 유죄가 판명되어 1895년 5월 그는 2년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 리딩 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옥중에서 더글러스에 대한 긴 편지를 썼다(1905년 〈옥중기 De Profundis〉로 철저히 삭제된 후 출판됨). 이 편지는 자기를 방탕의 길로 유인하고 마음을 어지럽혀 집필을 방해한 연하의 더글러스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1897년 5월 와일드는 파산상태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는 작가로서 재기할 생각으로 즉시 프랑스로 떠났다. 옥중 시기에 관한 작품으로는 〈리딩 감옥의 노래 The Ballad of Reading Gaol〉(1898)만 남아 있는데, 이 작품은 비인간적인 감옥의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끊임없이 재정문제로 고통을 받았지만,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그의 억누를 수 없는 쾌활함' 때문에 그는 계속 견뎌낼 수 있었다. 그는 막스 비어봄이나 후일 그의 유언 집행자가 된 로버트 로스 같은 충실한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고, 더글러스와도 다시 화해했다.

그러다가 귀 전염병으로 인한 격심한 뇌막염 증상으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는 의식이 몽롱한 마지막 순간에 그가 오랫동안 찬양했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