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오토

다른 표기 언어 Rudolf Otto
요약 테이블
출생 1869. 9. 25, 프로이센 파이네
사망 1937. 3. 6, 독일 마르부르크
국적 독일

요약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연구·발표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은 〈거룩함〉(1917)이다. 수공업자 빌헬름 오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기생애에 대해서는 힐데스하임에 있는 김나지움에 다녔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하는 동안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특유의 관심사를 자각하게 된 데에 있다. 오토에게 맨 처음 종교적 반응의 독특한 성격을 연구하도록 지도해준 스승은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였다. 오토는 슐라이어마허를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거룩함의 의미를 재발견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토는 여러 영향을 받아 슐라이어마허를 넘어서는 종교 범주를 재구성하면서 '거룩함'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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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학문경력
  3. 학문연구
  4.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5. 거룩함의 개념
  6. 후기 저서들
  7. 삶과 성격

개요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연구·발표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은 〈거룩함 Das Heilige〉(1917)이다.

초기생애와 학문경력

수공업자 빌헬름 오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기생애에 대해서는 힐데스하임에 있는 김나지움에 다녔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뒤 차례로 에르랑겐대학교와 괴팅겐대학교에 들어가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897년에 괴팅겐대학교 강사가 되어 신학·종교사·철학사를 가르쳤다. 1904년에는 괴팅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되어 1914년까지 가르치다가 브레슬라우(브로추아프)대학교 신학교수가 되었다. 1917년에는 마르부르크대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고, 그 중간에 1년 동안(1926~27) 총장직을 맡았다. 1929년에 은퇴한 뒤에도 마르부르크를 떠나지 않고 여생을 보냈다.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좋아서라기보다 의무감 때문에 시간을 내어 지역 공동체와 국가의 일도 맡아보았다. 1913~18년에는 프로이센 국회의원을 지냈고, 1918년에는 제헌의회(制憲議會) 의원을 맡아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의 분열을 연구하고 그리스도교와 세계의 다른 종교들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운동에 폭넓게 참여 했다.

학문연구

그가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하는 동안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특유의 관심사를 자각하게 된 데에 있다.

이 관심사(종교적 세계관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는 그의 첫번째 책 〈루터의 성령관 Die Anschauung vom heiligen Geiste bei Luther〉(1898)에 반영되어 있다. 〈자연주의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Naturalistische und religiöse Weltansicht〉(1904)에서는 이 연구를 좀더 확대하여 세계를 해석하는 자연주의 방법과 종교적인 방법을 대조함으로써 먼저 두 방법의 차이점들을 지적하고, 다음에는 이 차이점들이 과연 극복될 수 있는지, 혹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을 손쉽게 화해시키기를 거부했으며, 종교인들이 과학에 반감을 갖는 것과 과학자들이 종교를 무시하는 것에 똑같이 반대했다. 오히려 이 두 관점은 서로를 감싸주면서 인간이 사는 세계를 규명하는 각자의 목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세계관이 제아무리 합리적일지라도 과학의 발견들과 거기서 비롯된 보편화된 인식을 초월한 독특한 이해의 차원을 지니며, 오토의 주된 관심사는 이러한 특징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해명하는 것이었다.

〈자연주의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을 펴내고 나서 5년 뒤에 출판한 〈칸트와 프리스의 종교철학 Kantische-Fries'sche Religionsphilosophie〉(1909)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와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종교사상을 다룬 것으로서, 오토는 이 책에서 종교 연구에 적합한 합리성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1911~12년에는 장기간의 여행길에 올라 먼저 북아프리카·이집트·팔레스타인을 방문하고, 계속해서 인도·중국·일본을 둘러본 뒤 미국을 거쳐 돌아왔다.

이 여행에서 얻은 경험으로 그는 자신의 문제를 세계적인 맥락에서 설정하게 되었고, 세계 여러 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적 반응양식들을 더욱 넓고 깊이 탐구하게 되었다. 오토는 여러 나라 말을 능숙하게 할 줄 알았고, 세계종교사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연구를 할 만한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근동(近東) 종교들의 언어들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많은 고대 힌두교 저서들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인도 종교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비교하는 책을 여러 권 쓸 정도로 산스크리트를 충분히 알았다.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오토에게 맨 처음 종교적 반응의 독특한 성격을 연구하도록 지도해준 스승은 유명한 독일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였다.

오토가 관심을 쏟은 것은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초기 저서 〈종교에 관하여 : 종교를 경시하는 지식인들에게 주는 글 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n unter ihren Verächtern〉(1799)이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종교를 인식하는 윤리적·합리적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느낌 혹은 자각으로 종교를 인지하는 슐라이어마허의 참신한 방법에 끌리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훗날 이 독특한 느낌을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다. 오토는 이러한 체계적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슐라이어마허를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거룩함의 의미를 재발견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후에는 슐라이어마허가 그 책에서 강조한 것이 일상적인 혹은 '자연적인' 의존의 감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여 그 설명을 비판했다. 오토는 '절대의존'을 '피조물 감정'으로 대체했다. "피조물 감정은 또 하나의 감정 요소에서 나온 최초의 주관적 파생물이자 그 결과이다. 피조물 감정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지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자아(自我) 바깥에 있는 대상을 우선적으로 직접 가리킨다."

오토는 이 대상을 '누미노제'(das numinose) 혹은 '전적 타자', 즉 세속 영역을 철저히 초월하는 존재, 전통적으로 운위되어온 '초자연적' 혹은 '초월적' 존재와 거의 일치하는 존재로 보았다.

거룩함의 개념

세월이 흐르면서 오토는 여러 영향을 받아 슐라이어마허를 넘어서는 종교 범주(範疇)를 재구성했다.

괴팅겐대학교 학생시절에 그를 가르친 알브레히트 리츨은 종교를 가치판단의 영역에 두었으며, 괴팅겐대학교 교수이자 리츨의 동료 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선험(a priori)을 종교적 해석 및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다. 오토는 윌리엄 제임스가 〈다양한 종교체험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1902)에서 보여준 예리한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지만, 제임스의 경험적인 방법이 그런 현상을 해석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오토는 J. F. 프리스의 사상을 좋아했다. 프리스의 '안둥'(Ahndung : Ahnung의 옛날식 표현이며 문자적인 뜻으로는 '예감', '직관') 개념, 즉 진리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열망이라는 개념은 오토에게 종교현상을 민감하고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오토는 이 '진리의 느낌'을 그의 책 〈거룩함〉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신성과 세속). 오토는 이 책에서 이전의 수준을 넘어서서 종교 차원의 비합리적 측면을 더욱 자세히 연구했고, '오멘'(omen : 징조)이라는 낱말에서 '오미뇌스'(ominös : 불길한)가 파생한 데 착안하여, 라틴어 '누멘'(numen : 신·영혼·신성)에서 '누미노제'라는 용어를 만들어 '종교 차원의 비이성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종교 체험의 요소인 누미노제에 대해서 오토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누미노제는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음악작품의 아름다움처럼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철저한 개념분석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미노제는 상징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에서 오토는 이전의 연구들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지속해왔던 연구의 성격과 토대를 철저히 바꾸는 새로운 모험에 나선 셈이다.

여기서 오토의 관심사는 누미노제 자체를 인지하는 기본적인 체험에 참여하는 데 있었다. 오토는 누미노제를 인지하는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떤 것을 다루게 된다…… 그 느낌은 때로 부드러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예배에 깊이 몰두하는 평온한 상태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안정되고 일관된 상태에 있는 영혼이 충만해져서 한동안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하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느낌이 다 사라져 영혼은 다시 매일 겪는 '세속적인', 즉 비종교적인 분위기를 되찾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느끼는 첫 순간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현상이 나타나다가 다시 아름답고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느낌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피조물이 마음을 졸이며 떨고 말문이 막히는 겸손한 상태가 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 앞에서일까? 그것은 표현할 수 없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신비' 앞에서이다."

오토가 누미노제 체험형식으로 제시한 '신비'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용어가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고 한다.

'신비'는 누미노제 체험의 질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느낌으로 경험된다. 그 내용은 다음 2가지 양상으로 전달되는데, ① '사람을 압도하는 두려움과 장엄', ② '독특하게 마음을 끌고 사로잡는 것'이다. 전자로부터는 경이감, 즉 신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느낌이 오고, 후자로부터는 사람을 안심시키고 밝게 하는 신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체험이 온다. 두려움이 깃든 신비와 매료(魅了)라는 이 이중적인 충격이 바로 거룩한 것의 만남을 표현하는 오토의 독특한 방법이다.

후기 저서들

오토는 〈거룩함〉에서 개발한 방법을 다음 3권의 주요저서에 적용했다.

즉 〈동양과 서양의 신비주의 West-Östliche Mystik〉(1926)·〈인도의 은총의 종교와 그리스도교 Die Gnadenreligion Indiens und das Christentum〉(1930)·〈하느님의 나라와 사람의 아들 Reich Gottes und Menschensohn〉(1934)이다. 이 3권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사람의 아들〉로서 앞서 출판된 그의 책들에 비해 더욱 폭넓은 인정을 받았다. 이 책은 이전의 책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고, 현대사에 등장하는 궁극성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오토는 누미노제 체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극도로 통제된 조건 아래서 개신교 예배의식에 절박감과 생동감을 주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예배형태를 실험했다.

예배의식의 절정은 '침묵의 성례(聖禮)'였는데, 그 순서는 퀘이커교 예배식에 있는 침묵의 순간과 비슷한 기다림의 시간으로서, 그 자신이 퀘이커교 예배의식에 착안하여 만들었다고 시인했다. 그는 모든 종교를 거룩함에 대한 체험의 장(場)으로 여겨 신중히 대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갖고 있는 역사적인 신앙을 넘어서서 다른 종교 전승들에 속한 사람들과 자주 만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종교들의 독특한 특징들을 대단히 존중했기 때문에 모든 종교를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줄이는 것을 뜻하는 종교 통합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여러 종교 대표자들간의 활발한 상호 교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이런 관심을 가지고 조사 및 연구 목적으로 세계 여러 지역의 종교 상징물·의식(儀式)·형태·제구 들을 소장한 종교박물관을 마르부르크에 세웠고, '문화교류를 통해서 우리의 예술과 과학, 모든 영적 유산의 진수(眞髓)를 서로 해석하고 나누자는 취지'로 세계종교연맹의 설립을 주창했다.

삶과 성격

오토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과부가 된 누이와 조카딸과 함께 가족을 이루어 살았다. 훤칠하고 곧은 키에 몸가짐이 섬세했던 그는 당당한 인상을 풍겼다. 마르부르크대학교 학생들은 그를 '성자'(Der Heilige)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그가 죽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오토에게는 왕의 기품이 있었다. 왕 같으면서도 오만한 기색이 없었다." 루돌프 오토는 무엇보다도 학자로서, 특별한 연구 분야에 뛰어들어 엄격하게 학문을 추구했다.

이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근엄하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몰두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누구든 그를 만날 때는 함부로 말을 걸거나 가벼운 화제에 끌어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말을 걸려면 화제가 그만큼 의미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 친숙한 사람들은 그것이 그에게서 받은 인상 때문에 스스로 갖게 된 선입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했다.

오토는 겉으로는 근엄해 보여도 원래 온화한 사람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 감정을 잘 나타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형식이라는 벽이 일단 무너지고 나면 친절하고 외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진지하고 늘 연구에 몰두해 있는 학자의 기품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주지 않을 만큼 친화력과 다정함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