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요약 테이블
출생 1768. 11. 21, 프로이센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사망 1834. 2. 12,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되며 근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주요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석해놓았다.
1799년 일종의 신앙고백서로 쓴 <종교에 관해서 : 종교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하는 연설> 에서 종교란 '우주에 대한 느낌이자 직관' 혹은 '유한자 안에 있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이며, 그리스도교는 그 느낌에 개별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이라고 했다. 1804년 할레대학교에 간 그는 루터교 신학부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낭만주의적 관념론의 대변자였던 관계로 처음에는 냉대를 받다가 1년 뒤 정식 교수가 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침략하자 할레대학교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자기 사상을 강의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민족적인 저항을 일으키도록 격려했다. 1810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과 교육
  3. 초기 경력
  4. 할레와 베를린
  5. 영향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개요

일반적으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주요저서 〈그리스도교 신앙 Der christliche Glaube〉(1821~22, 제2판 1831)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석해놓았다(개신교).

어린시절과 교육

고틀리프 슐라이어마허와 카타리나 마리아(결혼 전 성은 슈투벤라우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혁교회(칼뱅주의) 군목이었던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성직자 가정 출신이었다. 누이 샤로테와 동생 카를이 있었다. 1783~85년 니스키의 유력한 경건주의자 단체인 모라비아 형제단(Herrnhuters) 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할레를 중심으로 발전한 경건주의 운동과 같이, 의도적으로 슬퍼하고 회개하려고 애쓰는 방식보다는 구원의 즐거움과 구주 예수와의 활기차고 상상에 가득 찬 관계에 근거한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개별학습을 시켰다.

이곳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평생 동안 간직한 그리스와 라틴 고전에 대한 관심과 종교생활에 대한 독특한 감수성을 발전시켰으며, 훗날 자신을 '고급 수준'의 모라비아 형제단의 일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1785~87년에 다닌 바르비에 있는 모라비아 신학교는 활력이 없고 교리적으로 편협하여, 점차 비판적이고 탐구적이 되어가던 그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1787년 아버지로부터 가까스로 승낙을 받아 모라비아 신학교를 떠났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속세 지향적인 그의 태도를 호되게 나무라며 위선자라는 비판도 했으나, 결국은 부활절에 할레대학교에 입학하도록 허락했다. 그곳에서 외삼촌 사무엘 슈투벤라우흐와 함께 살았는데, 신학교수인 그는 슐라이어마허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회의주의를 이해해주었다. 부지런하고 독립성이 강한 학생이었던 그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칸트의 윤리학과 종교 분야에서는 아니더라도 인식론에서만큼은 평생 칸트주의자로 남았다. 2년 뒤에 삼촌이 목회를 하고 있는 오데르 강변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 근처 드로센(오스노)으로 옮겨 처음으로 신학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학보다는 윤리학 저서를 더 많이 읽었지만, 1790년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시험을 치른 결과, 훗날 매우 독창적인 공헌을 하게 되는 과목인 교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대단히 우수함' 혹은 '뛰어남'이라는 성적을 받았다.

초기 경력

그뒤 프로이센 동부 슐로비텐에 있는 그라프(백작) 추 도나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가정교사 생활 외에도 주로 윤리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정기적으로 설교했고, 철학 특히 인간의 자유 문제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했다. 1794년 2번째 시험을 치렀고, 같은 해 아버지를 여읜 뒤에 란츠베르크에서 부목사가 되었으며, 1796년에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노인들을 위한 병원 겸 양로원인 '샤리테'의 목사가 되었다. 베를린에서 초기 낭만주의를 일으킨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을 통해 독일 낭만주의 작가 협회에 가입했고, 슐레겔과 한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플라톤의 저서들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베를린 학회와도 친숙하게 되었다.

1799년 일종의 신앙고백서로 쓴 〈종교에 관해서 : 종교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하는 연설 Über die Religion : Reden an die Gebilden unter ihren Verächtern〉에서 그는 낭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종교란 '우주에 대한 느낌이자 직관' 혹은 '유한자 안에 있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이며, 그리스도교는 그 느낌에 개별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와 문화를 생동감있게 하나로 묶는 시각 때문에 꾸준히 인기를 끌어온 이 책은 당시의 젊은 신학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다소 부자연스런 운율체 산문으로 쓴〈독백 Monologen〉(1800)에서 그는 종교를 개별화된 자아의 직관과 행위로 보았는데, 이는 종교를 윤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개별성을 무한자의 독특한 '기관이자 상징'으로 본다.

슐라이어마허는 베를린에 있는 어떤 목사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엘레오노레 그루노프에게 6년 동안 구애를 했으나, 1802년 포메라니아(지금의 폴란드 수웁스크) 스톨프에 있는 작은 개혁파 교회의 목사직을 맡으면서 그녀를 포기했고 그녀도 남편에게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1805년까지 그루노프가 자기 아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스톨프에서 목회생활을 하면서 목사와 현대인 사이에 깊은 균열이 나 있음을 깨달았지만, 동시에 설교하는 일에 큰 애착을 갖게 되기도 했다.

할레와 베를린

1804년 할레대학교로부터 설교자겸 임시 신학교수가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루터교 신학부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낭만주의적 관념론의 대변자였던 그는 처음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상황이 바뀌어 1년 뒤에는 정식 교수가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 형식으로 쓴 〈크리스마스 축하의식 Die Weihnachtsfeier〉(1805)에서 훗날 〈그리스도교 신앙〉에 삽입한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종교를 '감정과 직관'이라 말하지 않고 단순히 '감정', 즉 하느님이 유한한 인간인 우리들 속에서 살아 있으며 일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1807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침략하자 할레대학교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자기 사상을 강의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민족적인 저항을 일으키도록 격려했으며, 빌헴름 폰 훔볼트가 베를린에 새 대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도왔다.

1809년 친한 친구의 미망인 헨리에테 폰 빌리히와 결혼했고, 같은 해 베를린에 있는 삼위일체교회(Dreifaltigkeitskirche)의 목사가 되었으며, 1810년에는 새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1810년에는 신학과 철학을 강의했고, 삼위일체교회에서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거의 매주일 설교했으며, 베를린 학술원 회원(1800~)이자 종신 서기로 일했다.

사람들과 폭넓은 교제를 나누었으며, 후에 루터교와 칼뱅주의 교회를 하나로 연합시킨 프로이센 연맹이 결성되도록 적극 노력했다. 이 기간에 펴낸 주요저서에는, 신학의 기능은 교회를 종교 공동체로 묶는 것이고, 또한 교회를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기능을 교과과정으로 제시한 것으로 〈신학연구 개요 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s〉(1811)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다.

그는 1831년까지 프로이센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프로이센 헌법 및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개인적인 정적들의 음모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에 대해서 추방령이 내리기도 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1834년 2월 2일 마지막 설교를 하고, 2월 6일에 마지막 강의를 했다. 며칠 뒤 폐렴으로 죽었는데, 베를린의 모든 시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명한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에 따르면 2만~3만 명의 시민이 베를린 시가를 지나는 장례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교회 묘지에 묻혔다.

영향

그의 사상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신학에 계속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25~55년 사이에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 즉 '케리그마' 신학(카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가 시작함) 추종자들은 그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복음에서 이끌어내어 인간문화에 근거한 종교로 인도했다고 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그 이래로 슐라이어마허의 공헌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평가가 계속되어왔는데, 이는 '케리그마' 신학의 비평이 한편으로 치우쳤기 때문이기도 했고, 19세기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