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겔

슐레겔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von Schle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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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72. 3. 10, 하노버 하노버
사망 1829. 1. 12, 작센 드레스덴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작가·비평가.

초기 독일 낭만주의 운동을 고취하는 많은 철학이념들을 창안했다. 모든 새로운 사상을 자유롭게 받아들인 그는 자극적인 〈아페르쿠스 Apercus〉와 〈단편 Fragmente〉(〈아테네움 Athenäum〉을 비롯한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풍부한 연구계획과 이론을 펼쳐보였으며, 보편문학·역사문학·비교문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냄으로써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괴팅겐·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한 뒤 예나에서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과 계간지 〈아테네움〉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완전한 교육을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과 문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J. G. 피히테의 초월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시는 철학적인 동시에 신화적·반어적·종교적이어야 한다는 낭만주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반자전적 미완성 장편소설 〈루신데 Lucinde〉(1799, 영역 1913~15)와 비극 〈알라르코스 Alarcos〉(1802)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01년 예나대학교에서 잠시 객원강사로 있었으나, 이듬해 모제스 멘델스존의 큰딸이자 지몬 파이트의 전처였던 도로테아 파이트와 함께 파리로 갔으며, 1804년 그녀와 결혼했다. 파리에서 산스크리트를 공부하면서 〈인도의 언어와 지혜에 대해 Über die Sprache und Weisheit der Indier〉(1808)를 출판했는데, 이 저서는 인도게르만어에 대한 최초의 비교언어학적 시도로서 인도어와 비교언어학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1808년 부인과 함께 가톨릭에 귀의해서 낭만주의 이념을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과 결합시켰다.

나폴레옹에 항거한 독일 해방운동의 사상적 대변인이 되어 빈 대사관 사무국에서 일했고(1809) 카를 대공이 발표한 대(對) 독일 국민 호소문의 작성을 도왔다. 그무렵에 이미 예술지 〈오이로파 Europa〉와 〈도이체 무제움 Deutsche Museum〉을 편집하고 있었으며, 1820년 우익 가톨릭 신문인 〈콘코르디아 Concordia〉의 편집자가 되었는데, 이 신문에서 자신이 초기에 가졌던 이념들을 비판한 까닭에 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1810~12년 빈에서 한 2회 연속 강의는 〈근세사 강의 Über die neuere Geschichte〉(1811)와 〈문학사 강의 Geschichte der alten und neueren Literatur〉(1815)로 각각 출판되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중세'라는 개념이 전개되었다. 그의 작품 전집은 1822~25년에 처음 10권으로 출판되었다가 1846년에 15권으로 증보되었다. 형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1890년에 출간되었고, 도로테아와의 편지는 슐레겔 형제에 대한 주요연구서를 쓴 J. 쾨르너가 편집하여 1926년에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