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뢸치

트뢸치

다른 표기 언어 Ernst Troeltsch
요약 테이블
출생 1865. 2. 17, 바이에른 아우크스부르크 근처 하운스테텐
사망 1923. 2. 1,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교회는 지금까지의 절대진리에 대한 주장을 재고해야 한다고 충고함으로써 젊은 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자신의 재능이 정통신학보다는 종교철학에 있음을 깨닫고 베를린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915년부터 죽을 때까지 철학교수로 일했다. 그의 사상은 순수히 추상에 머문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의 방대한 지식에 근거했다. 그는 가족·길드·국가·교회·소종파 같은 소규모 사회단위들이나 집단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종교학을 상대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학문적 관심 외에도 사회와 정치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동안 바덴 상원의원을 지냈고 훗날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종교담당 국무차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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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와 활동
  3. 사상의 영향

개요

그는 교회는 지금까지의 절대진리에 대한 주장을 재고해야 한다고 충고함으로써 젊은 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신학, 사회역사와 사회이론, 종교철학, 역사철학 등에 이르는 많은 저서를 엮어 대표적인 저서 〈그리스도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Die Sozia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1912)으로 펴냈다(개신교).

생애와 활동

의사였던 아버지는 트뢸치가 어릴 때부터 과학적 관찰에 대해 열정을 갖도록 했고, 과학발전이라는 범주 안에서 역사와 문화 문제들을 보도록 이끌어주었다.

아우크스부르크 김나지움에서 고전 언어들과 문학에 탄탄한 기초를 쌓고 졸업한 뒤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자서전적인 수필에 따르면 당시 그에게 신학은 1가지 가치있는 주제를 연구하면서 역사·철학·사회학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들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학문으로 비쳤다고 한다. 에를랑겐대학교·괴팅겐대학교·베를린대학교 등에서 개신교(루터교) 신학을 공부한 다음 괴팅겐대학교에서 '프리바트도켄트'(강사), 본대학교에서 부교수(1892),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신학부 정교수(1894)가 되었다.

1901년 결혼하고 1913년 아들을 낳았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21년 동안 〈윤리학의 근본문제들 Grundprobleme der Ethik〉(1902)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교회의 발전과 연관된 여러 주제들을 가지고 많은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 가운데 대다수는 훗날 〈그리스도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실렸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교단·분파들의 사회윤리를 배경으로 사회단체·문화단체들이 자체 내 또는 서로간에 갖고 있는 관계를 연구했다. 1915년 자신의 재능이 정통신학보다는 종교철학에 있음을 깨닫고 베를린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923년 죽을 때까지 철학교수로 일했다.

사상의 영향

그는 교회는 그동안 교리들의 진실성을 주장하기 위해 지녀왔던 '절대주의자'의 태도를 철저히 재고해야 한다고 충고함으로써 당대의 젊은 신학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역사주의'(역사적 상대주의)에 매료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고통당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무엇이든 어느 시간이나 장소에서 평가·추구·인식·성취되는 것은 모두 그 시간이나 장소의 상황들과 관련이 있으며, 그 배경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는 이 견해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으나, 이것이 인간 행위를 다스리는 규범들(법적·종교적·윤리적)에 부적절하게 적용된다고 추측했다.

역사주의의 견해를 일관성 있게 적용한다면 현대의 입장에서 과거시대들을 이해하기란 전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양하면서도 역사에 따라 변하는 교회의 교리는 각 세대가 새로이 해석하는 계시된 진리의 절대적인 양상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자들은 트뢸치를 그리스도교의 확실성을 비판한 인물로만 평가해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독일계 미국 철학자의 P. 틸리히(1886~1965)는 〈칸트 연구 Kant-Studien〉(1924)에서 트뢸치가 종교의 순수한 상대성을 주장하기 위해 절대성을 희생시켰다고 비판했다.

트뢸치의 사상은 순수히 추상에 머문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자료들에 대한 방대한 지식에 근거했다. 그의 저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상투적인 참고 용어들을 기피했으며, 가족·길드·국가·교회·소종파 같은 소규모 사회단위들이나 집단들에 대한 연구를 선도했고, 종교학을 상대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영향력을 미쳐왔다.

개신교 내에서 그는 루터교와 칼뱅주의의 발생,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윤리학 및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로 중대한 공헌을 했다. 여기서 개신교 윤리학의 성격에 관해 친구인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1864~1920)와 견해를 같이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학 연구방법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갖고 있는 문화의 사회경제학적 구조에 대한 관점을 당시 유행하던 헤겔의 역사관(역사를 필연적인 변증법 과정에 따라 전진하는 것으로 본 관점)보다 더욱 흥미롭고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를 배격하고 더욱 융통성있는 문화·사회·경제적 요인들의 상호작용 개념을 지지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대성 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와 그가 말하는 역사발전 논리는 주요저서 〈역사주의와 그 문제들 Der Historismus und seine Probleme〉(1922)에 잘 나타나 있다.

트뢸치는 학문적 관심 외에도 사회와 정치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동안 바덴 상원의원을 지냈고 훗날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종교담당 국무차관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이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윤리·정치·사회 사상에서 비참하게 이탈해나가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한 그는, 그 첫번째 이유로 국가적 영광을 얻기 위해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희생시킨 점을 꼽았다.

영국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1923년 사망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해 3월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강의할 예정이던 5회분의 강연 원고들은 사후에 〈역사주의와 그 극복 Der Historismus und seine Überwindung〉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트뢸치의 저서 모음집 3권은 그의 생애 말년에 나왔고, 4번째 모음집 〈작품집 Gesammelte Schriften〉(4권, 1922~25)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이 모음집에는 그 자신이 널리 기억되기를 바라던 책들만 포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