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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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5. 3. 10(구력 2. 26),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894. 11. 1(구력 10. 20), 크림 리바디야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황제(1881~94 재위).
(영). Alexander Ⅲ. 정식 이름은 Aleksandr Aleksandrovich.

대의정부에 반대했으며 러시아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러시아 정교회와 전제정치 및 '민족성'(narodnost:러시아 민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제국 안에 있는 소수민족을 러시아화하고, 정교를 믿지 않는 종교 집단을 박해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상냥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버지를 거의 닮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교양있고 용감하지만 복잡한 큰할아버지 알렉산드르 1세를 닮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는 군주로서 일반 민중과 똑같이 거친 기질을 갖고 있었고 이 점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의 솔직한 태도는 이따금 거칠고 우락부락한 인상을 풍겼지만 자신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방식은 투박하고 고집스러운 용모와 잘 어울렸다. 태어난 뒤 20년 동안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므로 당시의 대공이 받는 형식적인 훈련밖에 받지 못했다. 이 훈련은 초등 및 중등 교육의 수준을 별로 넘어서지 못했는데 프랑스어·영어·독일어 교육 약간과 군사 훈련이 포함되었다. 1865년에 형 니콜라이의 죽음으로 러시아 황태자가 되자 비로소 법률가이자 정치철학자인 K.P.포베도노스체프한테서 법률과 행정의 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포베도노스체프는 알렉산드르에게 대의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고, 러시아 황제는 누구나 러시아 정교회를 열렬히 신봉해야 한다는 믿음을 심어 줌으로써,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형 니콜라이는 죽을 때 약혼녀인 덴마크 공주 다그마르를 후임 황태자와 결혼시켜 달라고 유언했다. 다그마르 공주는 그때부터 마리야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황태자 시절(1865~81) 알렉산드르는 그의 사상 가운데 일부가 당시 정부의 원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는 외국의 부당한 간섭, 특히 독일의 영향력에 반대했다. 그러나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슬라브주의자들의 허세를 종종 조롱했으며,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외교정책의 토대로 삼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대립이 처음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였다. 이때 황제는 프로이센에 동조했고 황태자는 프랑스에 동조했다. 이런 대립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유럽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1875~79년에도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황태자는 정부보다 더 슬라브주의적이었으나 1877~78년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침공군의 좌측 부대를 지휘하는 동안 환상에 깨어났다. 그는 양식있는 지휘관이었지만, 러시아가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얻은 성과의 대부분을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베를린 회의에서 도로 빼앗기자 분개했다. 더욱이 비스마르크는 그 직후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의 목적은 분명 러시아의 동유럽 게획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은 사실은 1887년까지 러시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러시아 육군과 해군을 과감하게 개편해 미래의 뜻하지 않은 사건에 대비하는 것이 러시아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881년 3월 13일(구력 3. 1)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고 이튿날 독재 권력은 그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통치 말년에 알렉산드르 2세는 니힐리스트들이 꾸미는 수많은 음모때문에 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암살당하던 날, 그는 많은 자문위원회를 신설하는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 자문위원회가 나중에 대의기구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로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3세는 발표되기 전에 이 칙령을 취소했고 그의 즉위 선언문에서 자신이 물려받은 독재 권력을 제한할 의도가 조금도 없다고 천명했다. 그가 시작한 내정개혁은 모두 그때까지의 지나친 자유주의 경향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러시아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혁명적 동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서유럽의 의회제도와 이른바 자유주의가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와 전제정치 및 '민족성'이라는 3가지 원칙이었다.

알렉산드르의 정치적 이상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하나의 종교, 그리고 하나의 정부형태를 갖는 국가였다.

그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독일인과 폴란드인 및 핀란드인에게 러시아어를 쓰게 하고 러시아 학교에 다니도록 강요했다. 한편 다른 신앙을 억압하는 반면 러시아 정교회를 육성했고 유대인을 박해했으며 변두리 지역에 남아 있는 독일과 폴란드 및 스웨덴의 제도적 잔재를 일소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젬스트보'(선거로 구성되는 지방 정부)를 무력하게 만들고, 농민 공동체의 자치정부는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지주의 감독을 받게 했다.

동시에 그는 제국 정부를 강화하고 중앙집권화하고자 애썼으며, 정부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려고 했다. 외교에서는 단호한 평화주의자였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화의 원칙을 지키는 열렬한 평화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행동에 분개했지만 독일과 공공연히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피했고, 한때는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통치자들이 맺은 삼제동맹을 되살리기까지 했다.

알렉산드르가 독일에 대해 좀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통치 말년, 특히 1888년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 즉위한 뒤부터였다. 1890년에 러시아와 독일의 동맹이 끝나자, 알렉산드르는 혁명의 온상이라며 싫어하던 프랑스와 마지못해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중앙 아시아 문제에서는 영국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러시아의 지배를 확대해나간다는 전통적인 정책을 고수했고, 모험적인 강경파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대체로 알렉산드르의 통치 기간을 러시아 역사에서 중대한 시기의 하나로 볼 수는 없지만, 가혹하고 비정한 통치가 이루어진 그의 시대에 러시아가 어느 정도 진보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