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베도노스체프

포베도노스체프

다른 표기 언어 Konstantin Petrovich Pobedonostsev
요약 테이블
출생 1827. 5. 21, 러시아 모스크바
사망 1907. 3. 23,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공직자, 보수적인 정치철학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의 가정교사 겸 고문으로 일했다.

'대심문관'이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러시아 절대군주제의 상징이 되었다.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교수를 지낸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고 가정교육을 받다가 1841~4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올덴부르크 법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성인이 된 후로는 원로원 모스크바 사무실을 시작으로 러시아 관료기구의 중심부에서 평생을 보냈다.

여가 시간을 이용해 러시아의 민법과 관료제도의 역사에 관해 출판물을 발행했으며 이를 인정받아 1859년에는 모스크바대학교 민법강사로 초빙받았다. 그는 짜임새·학식·명료함으로 탁월한 강의를 선보여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게 매년 황제의 아들들이 모스크바에서 지낼 때마다 가정교사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한 1864년의 사법제도 개혁에도 크게 기여했다. 1865년 황제의 권유를 받아들여, 모스크바대학교와 원로원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황제의 아들과 그 가족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점차 알렉산드르 2세의 모든 개혁조치에 반대하게 되었으며 특히 법원개혁에는 더욱 반대했다. 알렉산드르 3세의 가정교사이며 가장 가까운 고문으로서 그는 알렉산드르 3세를 매우 보수적인 군주로 만들었다. 1868년 원로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72년에는 국무협의회(고위자문기관)에, 그리고 188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성의회의 최고행정직인 총재에 임명되어 1905년 가을까지 일했다.

이 직위로 그는 국내정치, 특히 종교·교육·검열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막강한 권력을 쥐었다.

그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나약하고 사악하고 가치 없고 반항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인간과 사회의 완전성을 믿는 18세기 계몽주의의 견해를 비난했으며 따라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다. 각 국가는 영토, 가족, 국민적 교회를 기초로 성립한다고 보았으며 정부의 주요목적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복고신앙파·침례교·가톨릭교·유대교 등 모든 경쟁 종교집단에 대항해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회를 지키려고 했다. 또한 각종 소수민족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를 옹호했으며 이들 집단의 러시아화를 지지했다. 교회의 평신도 수장으로서 그는 종교를 강조하는 초등교육의 확산이야말로 독재정치의 보호막이 되어줄 것이라 보고 교구학교 내에 초등교육을 급속히 확산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타고난 각자의 신분을 지키게 하고 고등교육은 상류계층이나 특별히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시키려 했다.

또한 일체의 외국 영향, 특히 입헌민주정부에 관한 서유럽 사상을 금지·추방하려 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인종적인 소수집단이나 서구지향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시한 장본인이었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직후부터 그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알렉산드르 3세를 설득, 정부와 사회지도층 간의 틈을 좁히기 위한 이른바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1880년대 내내 정부의 보수적 국내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나 죽기 전 15년 동안에는 별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생전에는 체제비판자들에 의해,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가들에 의해 크게 과장되었다. 그 이유는 주로 그의 인간성이나 외모, 겉으로 드러난 견해 등이 러시아 지식인·자유주의자·급진주의자들 사이에 큰 불만이던 통치체제의 상징과 절묘하게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이 없었고 무미건조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1881년에 죽은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외하고는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는 매우 염세적인 금욕주의자였다.

반면에 상당한 학문과 학식을 지녀 외국 외교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유럽 언어들을 구사할 줄 알았으며, 비록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검열과 엄격한 통제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자신은 유럽이나 미국의 방대한 문학과 철학을 광범위하게 접했다. 특히 1890년 이후에는 러시아 정권이 혁명에 의해 타도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입헌 민주정부, 언론과 종교의 자유, 배심원 재판, 무상 세속교육 등에 관해 그가 품은 깊은 증오심과 두려움은 1896년에 출판된 평론집 〈모스크바 선집 Moskovskyy sbornik〉에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