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회화

송대 회화

다른 표기 언어 Sung-dynasty paintings , 宋代繪畵

요약 중국 송대(960~1279)에 이루어진 회화예술의 총칭.

송대에는 봉건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도시가 번영하여 귀족과 사대부의 회화에 대한 취향도 날로 강해져갔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회화예술의 발전과 수준향상이 촉진되었다. 북송의 수도였던 변경과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臨安 : 지금의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은 재능 있는 화가들이 모여든 지역이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 여진족이 세운 금(金) 등이 통치하던 지역의 회화는 각각 다른 수준의 발전을 보였다.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송대의 도시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시민계층이 커지고 도시의 그림 수요도 늘어났다. 그림 그리는 일이 고정적인 직업이 되어 사회와 더욱 폭넓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세속적인 미술이 종교적인 제재(題材) 및 귀족미술의 속박을 벗어나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는 뛰어난 기량을 지닌 화가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이들이 회화의 번영을 촉진한 주된 역량이 되었다.

송의 건국초에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이 세워지자 서촉(西蜀)·남당(南唐) 등지의 화가들이 줄지어 변경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후에도 화원은 끊임없이 민간으로부터 우수한 화가들을 뽑아들였다. 휘종(徽宗 : 1082~1135) 시기는 궁정 회화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융성했던 단계였다. 희녕(熙寧)·원풍(元豊) 연간(1068~85)에 문인·사대부의 회화활동이 매우 활발했고,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모두 뚜렷한 특색을 갖추었으며 이론상으로도 새로운 이론을 수립했다.

소식(蘇軾)·문동(文同)·이공린(李公麟)·미불(米芾) 등의 회화와 미학사상은 문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송대에는 보편적으로 회화 대상에 대해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연구하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생동감 있는 예술형상을 실제에 가깝게 표현하는 데 뛰어났다. 정밀하고 진정한 모습을 표현하려는 것(형상의 전형성과 세세한 진실까지 포괄하여)이 송대 회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송대 회화의 제재는 매우 광범위했고 형식의 풍격도 풍부하고 다양했다. 많은 화가들이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석(道釋)·인물·산수·동물·화죽화(화훼·묵죽)·영모화(翎毛畵)·계화(界畵) 등 세밀하게 분류된 분야 중에서 각각 전문적인 분야가 있었다. 도석화는 한 걸음 더 세속화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기교상으로도 수준 향상이 있었다. 이공린의 소박하면서도 아치 있는 인물묘사는 오도현(吳道玄)의 뒤를 이어 나타났으나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초상화는 벌써부터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고, 도시에는 전문적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직업이 있었다. 역사적인 고사(故事)에 대한 그림도 민간의 전설을 흡수하여 창작되고 있었다. 충신과 간신 간의 싸움과 민족관계를 반영하는 작품 중에는 옛 것을 빌려 당시의 현실을 풍자하는 작품이 많았다. 도시와 시골의 생활을 반영하는 풍속화는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시민·상인·수공업자·농민이 표현대상이 되었고, 수레[盤車]·물방아·노점상과 시끌벅적한 시장거리 등의 생활풍경이 대량으로 작품 중에 나타나고 있다.

갓난아이를 그린 그림도 인기가 있었다. 명절날 내걸어놓는 그림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산수화 가운데 폭이 넓은 병풍 벽화, 전경(全景)을 담은 대산대수(大山大水) 그림도 북송대에 여전히 유행했다.

이성(李成)·범관(范寬)·곽희(郭熙) 등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북방 산천의 선명한 형상을 묘사했다. 동시에 혜숭(惠崇)·조영양(趙令穰)이 소경(小景) 산수화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미불·미우인(米友仁) 부자는 수묵으로 강남(江南) 지방의 산천이 안개비에 젖어 어슴푸레한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산수화의 형식과 기교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왕희맹(王希孟)·조백구(趙伯駒) 일파의 청록산수(靑綠山水)는 뛰어난 수준이었다. 당대에 시작되어 마원(馬遠)·하규(夏珪)가 발전시킨 남송산수화파는 간결하고도 힘찬 대부벽준(大斧劈皴) 기법으로 험준한 산세(山勢)를 표현했다. 이들의 이러한 수법과 세심한 끊어 그리기, 교묘한 구상은 선명한 인상을 주며 예술적 매력을 지녔다. 화조화(花鳥畵) 중에는 황거채(黃居寀)를 대표로 하는, 가는 필치에 가벼운 채색을 하는 화풍이 있었다.

또 서숭사(徐崇嗣)가 창조한 '몰골화'(沒骨花), 시든 연잎과 오리·기러기가 있는 강 및 호수의 풍경을 그려 자연스러운 야성미를 표현한 최백(崔白)의 그림, 진기하고 화려하며 이국적인 새와 꽃을 대상으로 하여 조길(趙佶 : 휘종) 및 궁정화가들이 그린 화조화가 있었는데 그 영향은 곧바로 남송의 화조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인화가들은 수묵화를 위주로 했는데, 매화·대나무·고목(枯木) 등을 그려 정감을 표현함으로써 화조화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요·금의 상층 귀족 중에서도 화가들이 나왔다.

요동(遼東)의 단왕(丹王) 야율배(耶律倍 : 李贊華)는 외국산 말과 4불상(四不像)을 잘 그렸고, 거란족 화가 호괴(胡瓌)·호건(胡虔) 부자도 거란족의 수렵 등의 생활상을 잘 그려 유명했다. 랴오닝 성[遼寧省] 파쿠[法庫]의 요묘(遼墓)에서 출토된 〈산수누각도 山水樓閣圖〉·〈죽작화축 竹雀畵軸〉 등은 상층사회의 회화에 대한 애호를 반영하고 있다.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지린[吉林], 허베이 성[河北省] 등지에서 잇달아 발견된 요의 벽화묘(壁畵墓)는 민간 화가의 탁월한 창조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금나라 때의 통치지역 안에 있던 일부 사대부, 예컨대 왕정균(王庭筠)의 고목죽석(枯木竹石) 그림과 무원직(武元直)·이산(李山) 등의 산수화는 모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금의 회화는 원대 회화에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