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아

사모아

다른 표기 언어 Samoa 동의어 사모아독립국, Independent State of Samoa
요약 테이블
위치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인구 228,966명 (2024년 추계)
수도 아피아
면적 2,831.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사모아 독립국 (The Independent State of Samoa)
기후 열대성기후
민족 구성 폴리네시아계 사모아인(93%), 유럽인(7%)
언어 사모아어,영어
정부/의회형태 입헌군주제 / 단원제
종교 회중교회(35%), 로마가톨릭(20%), 감리교
화폐 탈라 (WST)
대륙 오세아니아
국가번호 685
GDP USD 881,000,000
인구밀도 81명/㎢
전압 220V, 240V / 50Hz
도메인 .ws

요약 태평양 중남부의 여러 섬으로 구성된 입헌군주국. 우폴루와 사바이 등 2개의 주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이름은 서사모아이며 수도는 아피아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폴리네시아계 사모아인이며 폴리네시아와 영국의 전통을 혼합한 헌법을 사용하고 있다. 문맹률은 아주 낮으며 대부분의 국민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해외이민으로 인해 연평균인구성장률은 낮다.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국민
  3. 경제
  4. 정치와 사회
  5. 역사
  6. 사모아와 한국과의 관계
    1. 외교
    2. 경제·통상·주요 협정
    3. 문화교류·교민 현황

수도는 우폴루 섬의 아피아이다. 뉴질랜드 북동쪽 2,900km 지점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아메리칸 사모아와 접해 있다.

사모아(Samoa) 국기
사모아(Samoa) 국기
지도
사모아

자연환경

사모아 제도에 속해 있는 사모아는 우폴루(1,119㎢)와 사바이(1,707㎢) 등 2개의 주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섬은 높은 화산섬이며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고 사바이 섬의 최고봉은 실리실리 산(1,859m)이다.

화산활동은 서쪽으로 진행되어왔는데, 지형적으로 사바이가 가장 최근에 생성된 섬이며 1905∼10년 마타바누의 화산, 1902년 무 산, 1690년경 아피 산이 화산폭발을 했다. 사모아에는 7개의 작은 섬이 있는데, 이중 아폴리마 섬과 마노노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사바이의 중앙 화산들은 용암고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용암고원은 구릉지대와 해안평야로 계속 이어져 있다. 우폴루의 중앙 화산지대는 해발 1,097m의 피토 산에서부터 구릉지대와 해안 평야지대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두 섬에는 폭포와 물살이 빠른 강이 여러 개 있다.

우폴루의 북부 해안에 있는 아피아는 연강우량 3,000㎜로 이 빗물이 분화구의 수원이 된다. 이 섬들의 내륙지방에서는 연강우량 7,000㎜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것은 아니다. 남동무역풍이 부는 5∼11월에는 기온이 22℃를 기록하며 11∼3월의 우기에는 36℃까지 올라간다. 1∼3월에는 강한 태풍이 불어오는데, 1889, 1966, 1968년에는 최악의 태풍이 이 섬들을 강타했다. 이 섬들의 화산토양은 비옥하지만 투과성이라 쉽게 마른다.

산이 많은 섬 중앙부에는 키 큰 상록우림, 코코스야자, 바링토니아속 식물, 판다누스가 숲을 이루고 있다. 지대가 낮은 습지는 홍수림으로 덮여 있으며 포도나무·양치나무 등이 많다. 동물상이 매우 희박하여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몇 종류의 도마뱀, 2종(種)의 왕뱀과 함께 큰 박쥐와 작은 박쥐들만이 서식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50여 종의 새가 서식하고 있는데 이중 아주 희귀한 디둥쿨루스 스트리기로스트리스 비둘기를 비롯한 16종의 조류들은 이 섬 고유의 새들이다.

담수 새우와 뭍게 종류들도 발견된다. 사상충증을 옮기는 모기, 독성이 약한 지네류와 전갈류들이 있으며, 1911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우연히 유입된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남방장수풍뎅이와 같은 곤충들이 있다. 폴리네시아의 쥐·야생짐승·돼지는 사람들에 의해 섬으로 유입되었다. 사모아에는 광물자원이 없으나 수력발전의 가능성은 매우 높다.

토이 토이가(Togitogiga) 폭포
토이 토이가(Togitogiga) 폭포

국민

사모아인들은 주로 폴리네시아 혈통으로 통간족,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거의 비슷하다. 그외의 소수종족으로는 유럽과 폴리네시아 혼혈족, 유럽인, 다른 태평양 섬의 원주민들과 중국인들이 있다. 공식 언어는 폴리네시아 방언인 사모아어와 영어이다.

사모아인들은 신앙심이 깊은데 대부분이 그리스도교도이며 그리스도교도의 약 3/4이 개신교이고 1/5은 로마 가톨릭이다. 개신교의 약 1/2은 사모아 회중교회, 나머지는 감리교·모르몬교·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등이다.

우폴루의 인구밀도는 사바이보다 4배 정도 높다. 연평균인구성장률은 해외이민으로 인해 낮은 편이다. 2024년 추계인구는 22만 8,966명이며, 인구의 37%가 15세 미만이고, 19%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평균기대수명은 남자 71세, 여자 76세이다(2024).

경제

사모아의 경제발전은 주로 농업·경공업·어업·목재업·관광업에 기초하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는 국민총생산(GNP)이 거의 제자리걸음이었으며, 1인당 GNP는 태평양의 다른 섬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낮다.

사모아는 국토의 4/5가 국유지이지만, 대부분 마타이(지도자)들에게 귀속된 땅이며, 마타이들은 아이가(방계일가 집단)에게 이 땅을 임대하고 있다.

나머지 1/5의 국토는 자유보유 토지이거나 공유지이다. 농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2/3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체국토의 약 2/5가 경작 가능한 땅이다. 전통적인 환금작물로는 코프라용 코코넛, 코코아, 바나나가 있고 최근에는 타로토란·열대과일·견과류 등도 포함된다. 자급용 작물로는 마·빵나무·포도나무 등이 있다. 돼지·소·닭 등을 기르며 우유도 약간 생산한다. 국토의 거의 절반이 산림으로 덮여 있으며 목재는 내수 및 수출용으로 생산된다. 제재소와 베니어 합판 공장들이 사바이 섬에 밀집되어 있는데 남벌을 방지하기 위하여 재식림(栽植林)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어업은 내수를 충족시키고 있지만 국제연합(UN)의 식량농업기구(FAO), 일본, 미국의 원조를 받아 어업기술·어선·어류냉동시설 등이 도입되었다. 참치가 어획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부는 제조업의 다변화를 추진해왔는데 제조업은 GDP의 1/8을 차지한다. 전통적인 식품가공업과 수공예품 외에도, 현대적 산업으로 기계공업, 경금속, 의류·신발, 동물사료, 코코넛 부산물, 양조, 과일·주스 통조림 산업이 이루어진다. 전력은 전체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화력발전으로, 나머지는 수력발전으로 충당되고 있다.

관광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호텔 시설들이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모아의 도로는 약 1/7이 포장되어 있고, 아피아와 사바이 섬의 아사우에 수심이 깊은 항구가 있다. 국제공항이 아피아 근교 팔레올로에 위치하고 국내선 전용 공항들도 몇 개 있다. 타로토란, 코코넛 크림, 자동차용 배선작업 용구, 맥주, 담배를 주로 수출하고, 식량·기계·연료·공산품 등을 수입하는데, 수입이 수출을 크게 초과한다. 주요무역국은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미국과 아메리칸 사모아 등이다.

사모아에 온것을 환영하는 표지판
사모아에 온것을 환영하는 표지판

정치와 사회

1960년에 제정된 사모아 헌법은 폴리네시아와 영국의 전통을 혼합한 것이다.

2명의 최고 지도자(o le ao o le malo)가 국가공동수반이 되며, 어느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는다. 그다음 급의 국가수반은 5년 임기로 국회(Fono)에서 선출되는데 국회의원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에는 마타이만이 입후보할 수 있다. 사모아에는 인권보호당·국가발전당 등의 정당이 있다. 사법체계는 최고법원이 이끌고 있으며, 별도의 토지·권리 법원이 있어 토지와 전통적인 권리에 관한 분쟁을 해결한다. 보건상태는 양호하며 평균수명은 약 67세이다. 우폴루와 사바이에 아피아 국립병원의 지원을 받는 지방병원이 있고 아피아 국립병원에서는 간호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교육제도는 뉴질랜드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닌다. 공립 및 교회 재단의 초등학교에서는 사모아어로 교수하며, 제1외국어로서 영어를 가르친다. 중학교·직업학교·사범학교도 있으며, 1988년에는 사모아 국립대학교가 세워졌다. 거의 모든 인구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전화 및 텔렉스 서비스가 가능하고 아피아 라디오는 항해용 무선전화와 전보 서비스 업무를 24시간 시행하고 있다. 사모아 국영 라디오는 사모아어와 영어로 매일 방송을 하며,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은 뉴질랜드 텔레비전 방송사에 의해 운영되며,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시 인접한 아메리칸 사모아로부터 공급 받는다.

개인소유의 주간지가 몇 개 있다. 국립박물관과 문화회관은 1984년에 문을 열었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전통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으며, 주일과 저녁기도를 위한 통금제도는 지방에서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정부에서나 지방에서 모두 중요한 손님을 접대할 때 카바를 마시는 의식이 있다. 혼혈 사모아인이나 비사모아계 사모아인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마타이와 아이가의 사회제도가 정착되어 있다.

대화와 사회적인 교제를 하는 데도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복잡한 예의규범이 있으며 가택 내에서의 사생활은 엄격히 존중된다.

네트워킹아이콘으로 표현한 사모아 국기
네트워킹아이콘으로 표현한 사모아 국기

역사

라피타 도기를 만든 폴리네시아인들은 BC 1000년 사모아 제도에 처음 정착했다.

사모아어의 특성을 보면 정착민들이 통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200년경 도기제조가 중단되었고 그때까지는 사모아가 중심지였지만 사모아를 출발점으로 하여 폴리네시아 동부의 많은 지역에 정착이 이루어졌다. 하와이키(사모아어:사바이)는 다른 섬 사람들의 전통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떠나온 고향과 매우 유사했다. BC 300년경 사모아에는 상당한 숫자의 정착촌이 있었으나 응집력이 없었다. 이 정착촌에는 가정집, 제사용 고분, 농업용의 계단식 대지들이 있었으며 특히 고분에는 독특한 별 모양의 고분들과 함께 풀레멜레이·팔라울리 지역 및 사바이 섬 등의 남태평양 도서에 현존하는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고분들도 있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잠시 동안 최고 지도자가 있는 계층화된 사회와 요새화된 정착촌들이 나타났다(폴리네시아 지리적 인종). 1722년 네덜란드의 항해가 야코프 로헤벤이 이 섬들을 발견했고 1768년 프랑스의 탐험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사모아인들의 카누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 제도를 네비게이토 제도라고 명명했다. 1787년 라 페루스 백작인 장 프랑수아 드 갈로가 이 섬들을 측량했다.

런던 선교회 회원 2명은 1830년 사바이에 정착한 뒤 1834년경 사모아어를 글로 기록했다(선교). 사모아의 지도자는 1838년 영국 선박 콘웨이호의 베선 선장, 1839년 미국 측량대 대장 찰스 윌크스와 각각 상업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근거해서 사모아는 유럽·미국과의 대외관계를 전개했다. 1847년 대영제국, 1853년 미국, 1861년 독일은 각각 사모아에 영사를 임명했고, 유럽 이주민들과 상사 대리점이 1800년대 중반까지 아피아 부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국인의 지원을 받은 사모아의 최고 지도자들은 이 나라의 절대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1848∼73년에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미국의 특수요원 A.B. 스타인버거 대령의 중재로 평화협상(1873)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었다.

1875년 스타인버거는 유럽식의 헌법 초안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1876년 영국군에 체포되어 국외추방을 당할 때까지 이 나라의 실질적인 독재자 노릇을 했다. 당파간의 교전상태가 다시 시작되자, 1879년 영국은 영국이 지배하는 지방자치체를 설치했다. 지도자간의 계속되는 분쟁과 아피아에 대한 영향력을 쟁취하기 위한 영국·독일·미국 간의 경쟁은 1889년 3월 16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은 독일 군함 3척과 미국 군함 3척이 태풍을 피하여 아피아 항에 정박해 있던 중 해변으로 밀려나오거나 침몰함으로써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독일·미국 3국은 1889년 사모아의 독립과 중립에 합의하는 베를린 조약을 체결했다. 사모아 국왕과 지도자 간의 분쟁이 다시 시작되자 1899년 재소집된 강대국 3국은 1889년의 조약을 무효로 하고 사모아 제도를 병합했다. 이때 독일이 경도 171°를 기준으로 서쪽 섬들에 대한 우선권을, 미국이 동쪽 섬들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받았다(대영제국).

독일 통치하에서 고통을 받던 사모아인들은 1908년 사바이에 근거지를 둔 마우 아 풀레 저항운동을 결성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뉴질랜드가 사모아를 점령했고 군부통치하에서 유행성 독감으로 총인구의 1/5이 넘는 8,500명의 사모아인들이 죽었다. 1920년 국제연맹은 가맹국인 뉴질랜드에 사모아의 위임통치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계속되던 마우 아 풀레 저항운동은 1929년의 총격전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1936년부터 뉴질랜드 정부는 화해정책을 추진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단되었다. 미군이 우폴루에 공항과 도로를 건설한 것이 경제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가 통치하는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으나, 국가위원회 및 포노의 결성(1947)과 함께 사모아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961년 헌법초안이 승인되었고, 뒤이어 실시된 UN 감시하의 국민투표에서 독립결의안과 함께 헌법초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비준되었다.

마침내 사모아는 1962년 1월 1일 독립이 되었고 그해 말경에 뉴질랜드와 우방조약이 체결되어, 뉴질랜드는 사모아의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해 사모아의 대리국으로 외교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투 푸아 타 미세스 레알로 피(Tupua Tamasese Lealofi III ) 3 세의 묘비
투 푸아 타 미세스 레알로 피(Tupua Tamasese Lealofi III ) 3 세의 묘비

사모아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사모아는 한국과 1972년 9월에 수교했으며, 한국은 주 뉴질랜드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고, 사모아는 두 중국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사모아는 2010년 5월에  재무장관, 2014년 8월에 국가원수, 2017년 12월에 총리가 방한했으며, 한국은 2015년 5월에  김해용 주 뉴질랜드 대사(신임장 제정), 2017년 9월에 방문했다. 한편 사모아는 북한과 1978년 6월에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1983년 12월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이유로 단교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사모아는 한국의 제138위 수출대상국이자 제188위 수입대상국이다. 양국 간의 경제협력·통상관계는 미미한 편으로 2023년 기준 대한국 수출액은 44만 달러, 수입액은 2,532만 달러이다. 한국은 1987년부터 2016년까지 사모아에 388만 달러를 원조했으며, 2006년부터 2016년까지 2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은 1982년 사모아의 농업 분야 연수생 1명, 1983년 어업 및 농업 분야 연수생 1명씩을 초청하여 연수시킨 바 있다. 사모아에서는 2015년 기준 162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참고자료

  • ・ 외교부
  • ・ 주 뉴질랜드 대한민국 대사관
  • ・ 한국무역협회 통계
  • ・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2023년 기준)
  • ・ 법무부 등록외국인 국적별 현황(2023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