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갱빌

부갱빌

다른 표기 언어 Louis-Antoine de Bougainville
요약 테이블
출생 1729. 11. 11, 프랑스 파리
사망 1811. 8. 3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항해가.

해군지휘관으로서 남태평양을 탐험했으며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1766~69)를 했다. 그의 보고서 〈세계일주 항해 Voyage autor du monde〉(1771, 영역판 1772)는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개념은 당시 프랑스 사상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24세 때 육군에 입대해 루이 조제프 드 몽칼름 장군의 부관으로 캐나다에 파견되었으며 프렌치인디언 전쟁 때 영국군에 대항해 싸우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763년 육군에서 제대하고 해군에 입대했으며 이듬해 대서양을 항해해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 근처 포클랜드 섬에 프랑스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는 1767년 스페인에 양도되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계일주 탐사의 항해 승인을 얻은 뒤 1766년 12월 박물학자와 과학자를 대동하고 항해를 시작했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남태평양을 지나 북서쪽으로 나아가 타히티에 도착했다. 이후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사모아와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경유했으며 계속 서진하는 동안 유럽의 어느 선박도 항해해보지 못한 해역으로 들어갔다.

그레이트배리어리프 주변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보지 못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솔로몬 제도의 끝을 지나 뉴브리튼으로 나아갔다. 당시 선원들은 괴혈병에 시달렸으며 선박들도 수선작업이 필요해 1768년 9월 몰루카의 부루와 자바의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항해를 멈추었다. 1769년 3월 7명의 선원을 잃고 브르타뉴의 생말로에 귀환했다.

1772년 루이 15세의 비서가 되었으며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프랑스 함대의 북아메리카 해안 작전(1779~82) 때 제독으로 활약했다. 1782년 4월 12일 마르티니크 해안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프랑스 혁명기간중 1792년 파리 학살사건에서 위기를 모면하고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정착했다. 나폴레옹 1세로부터 상원의원과 백작에 임명되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솔로몬 제도의 가장 큰 섬과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해협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부겐빌리아라는 식물의 속명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