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들리

브래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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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93. 3,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셔본
사망 1762. 7. 13, 글로스터셔 챌퍼드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1728년 지구의 연주운동으로 인해 별의 겉보기 위치가 미소하게 변하는 별빛의 광행차를 발견·발표했다. 이 발견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최초의 직접적인 증거였다.
옥스퍼드 밸리올 칼리지에서 1714년 학사학위, 1717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삼촌 제임스 파운드 목사에게 에식스 원스테드에서 관측천문학을 지도받았다. 그의 삼촌은 목사이자 유능한 아마추어 천문학자였으며, 그를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에게 소개시켰다. 핼리의 추천으로 1718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자 그의 과학적 통찰력은 더욱 빛났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된 뒤, 태양 주위를 지구가 궤도운동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에게는 별의 시차(6개월을 주기로 하는 별의 위치 변화)를 관측·측정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1725년 브래들리는 별의 겉보기 위치 변화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전진하는 지구의 궤도운동으로 생기는 광행차 때문에 일어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한 정량적인 관측을 바탕으로 빛의 속도가 295,000㎞/sec라는 것을 증명했고,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증명했다.

1728년 지구의 연주운동으로 인해 의 겉보기 위치가 미소하게 변하는 별빛의 광행차를 발견·발표했다.

이 발견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최초의 직접적인 증거였다.

옥스퍼드 밸리올 칼리지에서 1714년 학사학위, 1717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삼촌 제임스 파운드 목사에게 에식스 원스테드에서 관측천문학을 지도받았다. 그의 삼촌은 목사이자 유능한 아마추어 천문학자였으며, 그를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에게 소개시켰다.

핼리의 추천으로 1718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자 그의 과학적 통찰력은 더욱 빛났다. 교회의 성직 안수식을 받고 1719년 브리드스토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웨일스 펨브로크셔에 있는 본당의 명목뿐인 부재 교구 목사직 덕분에 이 지위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더 많아졌다. 이 직책은 그를 위해 그의 친구이자 천문학 동료인 새뮤얼 몰리눅스가 알선했다. 1721년 옥스포드의 새빌좌(座) 천문학장에 임명되었을 때 교회의 직책을 그만두고 그후 천문학에만 전념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출판된 뒤, 태양 주위를 지구가 궤도운동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에게는 별의 시차(6개월을 주기로 하는 별의 위치 변화)를 관측·측정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정보는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는 그당시의 진보적인 생각에 대한 수학적이고 개념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적인 증거였다. 이러한 시차에 대한 증거가 없었던 16세기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17세기에 덴마크의 천문학자 올레 뢰머는 시리우스와 직녀성의 겉보기 변위를 측정했으나, 관측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1669년 왕립학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도 비슷하게 용자리 감마 별을 계속 관측·측정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1725년 브래들리는 몰리눅스의 집을 천문대로 이용하여 빛의 굴절로 인한 오차를 피하도록 고안된 망원경으로 용자리 감마 별에 대해 훅이 했던 측정을 다시 시도했다.

별이 너무 멀어 시차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뒤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2가지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다. 용자리 감마 별이 놀랍게도 3일에 1″ 정도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관측했던 것이다. 이것을 시차라고 생각하기에는 양이 너무 크고 방향도 틀렸다. 브래들리는 템스 강을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이 바뀌지 않아도 배의 진행방향이 바뀌고 그에 따라 돛대에 달린 풍향계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보고 나서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별의 겉보기 위치 변화는 의 속도가 일정하고 전진하는 지구의 궤도운동으로 생기는 광행차 때문에 일어난다고 결론을 내렸다. 몰리눅스가 죽은 직후인 1728년 그는 이 발견을 왕립학회에 알렸다. 정량적인 관측을 바탕으로 빛의 속도가 295,000㎞/sec라는 것을 증명했고,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증명했다.

또한 1727~32년에 수행한 별 관측은 광행차로는 설명할 수 없어서 '몇몇 붙박이별의 연중 적위변화'라고 했다(천체역학). 그는 이러한 변화가 지축(地軸)이 미세하고 균일하지 않게 흔들리는 운동인 장동 때문에 일어나며 이러한 장동은 달의 인력 방향이 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달이 한 번 공전하는 동안 주의 깊고 확실한 관측을 해보고 나서 이 발표를 했다. 1748년 이 업적으로 런던 왕립학회의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1742년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의 '감찰자 겸 감독자' 역할을 하는 왕립학회 회원들은 그를 핼리의 뒤를 이을 왕립 천문대장으로 추천했다(핼리는 존 플램스티드의 뒤를 이은 2대 왕립천문대장이었음). 1년에 250파운드를 받았으며, 더욱 정밀한 2.4m 상한의(象限儀)의 측정을 위해 그당시로서는 큰 돈인 1,000파운드를 보조금으로 받았다.

1744년 수재나 피치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었다. 죽기 몇 년 전까지 그리니치에서 과학·행정·자문에 관련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관측결과는 그가 죽은 뒤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연구에 대한 상속인들과 영국해군성 간의 소유권 분쟁 때문에 출판이 1798년에서 1805년까지 미루어졌다. 독일의 수학자 프리드리히 베셀은 브래들리의 기구에 있었던 작은 오차를 수정한 뒤 별의 위치를 계산하면서 브래들리의 자료를 분석·체계화했다.

그는 정밀성에 대한 탐구를 이끈 뉴턴 이후 최초의 관측천문학자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