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피기

말피기

다른 표기 언어 Marcello Malpighi
요약 테이블
출생 1628년 3월 10일, 이탈리아 파팔 볼로냐 근처 크레발코레
사망 1694년 11월 30일,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의사·생물학자.

생물의 연구에 필요한 실험방법을 개발하여 미시해부학(微視解剖學)의 과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말피기 이후로 미시해부학은 생리학·발생학·실용의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학문이 되었다(미생물학).

그의 아버지가 '문법 공부'를 시켰다는 사실과 1646년 볼로냐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21세 때 부모가 모두 죽었으나 그는 공부에 계속 전념했다. 그는 볼로냐 출신이 아니라는 학교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53년에 의학과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채용되었으며 그때부터 해부학과 의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656년 토스카나의 페르디난도 2세가 그를 피사대학교의 이론의학교수로 초빙했다.

그곳에서 수학자이자 박물학자이며 최초의 과학학회 중의 하나인 실험 아카데미(Accademia del Cimento)의 저명한 학자인 조반니 보렐리를 만나 일생 동안 우정을 나누게 된다. 말피기는 당시 피사에서 유행하던 의학교육에 회의를 품고 혈액의 색 변화에 대한 실험을 시도했으며 당시의 해부학적·생리학적·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가족 부양 문제와 건강의 악화로 1659년에 볼로냐로 돌아왔다.

(폐순환) 그곳에서도 강의와 현미경을 통한 연구를 계속하여 1661년 소동맥과 소정맥을 연결하는 폐혈관과 모세혈관 그물망을 확인하고 그것에 대해 기술했다. 그의 관점은 많은 논쟁과 반박을 불러일으켰는데 대부분은 동료들의 질시와 시기, 이해 부족 때문이었다.

볼로냐의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1662년 11월, 동물 기능에 대한 물리적 힘의 영향을 연구중이던 보렐리의 권유로 시칠리아에 있는 메시나대학교의 내과학 교수직을 수락했다. 그는 또한 과학의 후원자이자 그의 제자였던 프란카빌라 자작(子爵)의 환대를 받았는데 그의 이해는 말피기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말피기는 강의와 의술을 행하면서 현미경을 통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미뢰(味雷)를 발견하고 그것을 신경말단으로 간주했으며, 뇌·시신경·지방저장조직의 미세구조를 기술했고, 1666년 적혈구를 최초로 관찰하여 혈액의 색이 적혈구 때문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와 강의는 또다시 동료들 사이에 시기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메시나에서 4년을 보낸 후 말피기는 1667년 1월에 볼로냐로 돌아와 시술을 하면서 간·뇌·비장·신장과 같은 특정 기관, 뼈,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된 피부층 깊숙한 곳 등의 세부구조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현미경으로 관찰된 미세구조에 감명을 받은 그는 대부분의 생체가 샘[腺]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큰 기관도 작은 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샘들은 분비액의 분리나 혼합을 위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메시나에서의 말피기의 연구는 영국 왕립학회의 관심을 끌어, 1668년 학회 간사(幹事) 헨리 올든버그가 말피기에게 서신 왕래를 요청했다. 그 후로 말피기의 업적은 왕립학회의 학회지인 〈철학회보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편지형식으로 정기적으로 발표되었다.

1669년 그는 이탈리아인으로는 최초로 왕립학회의 명예회원이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모든 저술은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따분한 시술과 연구를 포기하고 보수가 많은 여러 직책들을 얻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끝내 일반 시술과 교수직을 고수했다. 볼로냐에서 보낸 기간은 그의 경력에 있어 절정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현미경의 사용범위를 크게 확대시켰다. 그는 곤충유생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는데 그것은 이후의 곤충유생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669년에 이루어진 누에의 구조와 발생에 대한 연구였다(누에나방속). 1673년 대동맥궁(大動脈弓)·신경습(神經褶)·체절 등을 발견하게 된 닭의 발생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그는 대체로 발생에 대한 하비의 관점을 따랐으나 알 속에는 수정된 배(胚)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 1675~79년에 걸쳐 다양한 식물체들을 미시해부학을 통해 비교·연구했고, 식물과 동물의 구성이 유사함을 발견했다.

일생의 마지막 10년간은 개인적 불행, 악화된 건강, 극에 달한 비판이 그를 괴롭혔다.

1684년 그의 저택에 불이 나서 실험도구와 현미경이 산산히 부서지고 논문과 저서, 원고들이 소실되었다. 그에 대한 반대가 쌓여갈 무렵 보상이라도 하듯 그의 능력을 인정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가 그를 주치의로 초청했는데 이것은 대단한 명예였다. 로마에서 그는 백작작위를 얻고 의학박사회(College of Doctors of Medicin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로마 귀족명부에 이름이 오르고 명예시종(honorary valet)의 직함이 주어졌다.

말피기에 대한 평가

말피기는 최초의 조직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거의 40년간을 현미경을 통해 동식물 구조의 주요한 유형들을 기술했고, 그것을 통해 이후 생물학자들에게 식물학·발생학·인체해부학·병리학 등의 주요 분야들을 제시해주었다.

갈릴레오가 광학렌즈라는 새로운 기술을 지구 밖의 관찰에 적용했듯이 말피기는 육안으로는 관찰할 수 없었던 생물체의 복잡한 구조 연구에 현미경을 사용했다. 더욱이 그는 일생을 통해 신체기능에 관한 일반적 개념들에 대해 계속 의문을 던졌다. 예를 들어, 그는 혈액이 모세혈관을 통해 흐른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하비의 주장이 옳았으며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혈액이 말초에서 살로 변한다는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장 사구체, 요관, 피부유두, 미뢰, 간 분비선의 구성 요소 등의 발견이 진료를 얼마나 개선시킬 수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공공연히 가혹한 비난을 받았는데, 그러한 그의 새로운 발견과 이전의 관념들은 17세기 내내 논쟁을 벌였다. 비록 새로운 발견으로부터 어떤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는 생체의 미세구조를 보여줌으로써 미세 해부학이 고대 의학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확신했으며 인체 생리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해부학적 기초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