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앙리 마티스

다른 표기 언어 Henri(-Émile-Benoît) Matisse
요약 테이블
출생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피카르디 르카토
사망 1954년 11월 3일, 니스
국적 프랑스

요약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인 20세기 프랑스 화가로 주요 작품은 <저녁 식탁>과 <열린 창>과 <삶의 기쁨>.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법률 사무소 서기를 지내다가 변호사를 포기하고 미술 공부를 시작했는데 화가가 되기 위해 줄리앙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초기에는 인상파 풍의그림을 그렸으며 이후 야수파 운동을 이끌었고 평생 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그의 소재는 주로 실내풍경이나 구상적 형태였으며,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지중해 특유의 활기를 담고 있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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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형성기
  3. 혁명기
  4. 코트다쥐르 시절
마티스(Henri Matisse)
마티스(Henri Matisse)

개요

20세기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로 간주되기도 한다.

1900년경에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티스는 평생 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그의 소재는 주로 실내풍경이나 구상적 형태였으며,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지중해 특유의 활기가 넘쳐 흐른다.

형성기

곡물 산업에 종사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20세가 되기까지 예술에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882~87년에는 생캉탱의 중등학교에 다녔고 파리에서 1년 동안 법률을 공부한 뒤, 생캉탱으로 돌아와 법률사무소의 서기가 되었다. 그는 현지의 캉탱 라투르 학교에서 이른 아침에 여는 소묘 강습을 받기 시작했고, 1890년에는 심한 맹장염에 걸려 누워 있는 동안 채색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갖다준 유화물감 상자 속에 그려진 그림의 사진을 베꼈지만 얼마 후에는 르카토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1891년 그는 변호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압살롬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센 강 왼쪽 연안에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예술학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시절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원칙에 따라, 일 속으로 곤두박질치듯 뛰어들었다. 그 원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둘러라!'였다. 내 부모와 마찬가지로 나는 무언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서둘러 일을 시작했고, 오늘날 나는 나를 떠미는 그 힘이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내 생활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 태생의 중산층에서 나온 이 19세기적 복음 인, 사람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신조는 마티스의 인생 전체를 특징짓게 되었다.

금테 안경, 정성껏 다듬은 짧은 턱수염, 약간 살찐 체구, 보수적인 옷차림의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그의 겉모습은 파리의 선도적인 전위 예술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전위 예술가가 되지는 않았다. 1891년에 공립 미술대학의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사립학교인 쥘리앵 아카데미에 등록했는데, 이 학교 교장은 전통을 엄격히 따르는 아돌프 기욤 부게로였다. 부게로는 당시 은근히 선정적인 모습의 벌거벗은 요정들을 즐겨 그리는 화가로서 명성이 절정에 올라 있었지만, 그후 이 명성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마티스가 그런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놀랍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는 생캉탱에서 암탉과 양계장을 그리는 화가의 추천을 받아 그 학교에 등록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티스 자신도 아직 시골뜨기로서, 폴 세잔과 폴 고갱 및 빈센트 반 고흐의 후기 인상주의에 이미 친숙해져 있던 파리에서는 구식이 되어버린 취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초기 그림은 1850년대에 프랑스 사실주의자들이 즐겨 채택했던 17세기 네덜란드 양식을 보여준다. 1892년에 그는 쥘리앵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장식미술학교 야간부에 등록하는 한편, 이 학교 교수이자 상징파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 되었다. 입학시험은 면제받았다. 너그러운 스승인 모로는 자신의 화풍을 제자들에게 강요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성을 계발하거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를 보고 배우도록 격려했다. 마티스는 중간에 몇 차례 중단했던 적이 있었지만, 1899년까지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모로가 죽은 뒤 교수가 된 페르낭 코르몽은 너그럽지 못한 화가였으며, 마티스는 결국 1899년에 이 화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마티스는 초상화가인 외젠 카리에르가 이따금 강의했던 사립학교에 한동안 자주 드나들었다.

1896년에 마티스는 보수적 취향의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살롱에 그림 4점을 출품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 협회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정부는 그의 작품인 〈책을 읽는 여인 Woman Reading〉(1894)을 사들였다.

이때부터 그는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점점 더 자신만만하고 대담해졌다. 그후 2년 동안 그는 브르타뉴로 취재 여행을 떠났고, 노련한 인상파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를 만났으며, 얼마 전에 보수주의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가운데 프랑스 국가에 기증된 귀스타브 카유보트 소장품에서 인상파 미술의 걸작들을 발견했다. 그의 색채는 한동안 더욱 밝아지고 강렬해졌다. 1897년에 그는 표현방식면에서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첫걸음을 떼어놓았고, 〈저녁 식탁 The Dinner Table〉(또는 〈La Desserte〉)으로 살롱전에서 가벼운 물의를 일으켰다.

짙은 빨간색과 초록색을 사용한 이 작품에서 그는 르누아르풍의 광채와 엄격한 고전주의적 구도를 결합시켰다. 1898년에 툴루즈 출신의 아가씨 아멜리 파레르와 결혼한 마티스는 1년 동안 파리를 떠나 런던에서 J. M. W. 터너의 그림을 연구한 뒤, 코르시카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지중해의 햇빛과 색깔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혁명기

조르주 쇠라가 죽은 뒤 신인상파 또는 점묘파의 이론가이며 설득력이 강한 폴 시냐크는 1898년에 문학 평론지인 〈르뷔 블랑슈 La Revue Blanche〉에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파까지를 발표했다.

1899년에 파리로 돌아온 마티스는 이 논문을 읽고 당장 기법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화폭에 색점들을 늘어놓으면 눈의 망막 위에서 여러 가지 색깔이 뒤섞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묘파의 생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모더니스트 미술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한테서 폴 세잔이 그린 〈목욕하는 세 여인 The Three Bathers〉과 폴 고갱이 그린 〈소년의 얼굴〉,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소묘 1점을 사서, 이 새로운 기법을 더욱 깊이 연구했다.

그는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이나 파리 교외의 아르퀴유로 나가거나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창문을 열어놓고 야외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야외로 나갈 때는 역시 순수한 색채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친구 알베르 마르크도 마티스와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신인상주의). 마티스는 볼라르한테서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인 앙리 로슈포르 흉상의 석고 모형도 사들였고, 1899년에는 미술대학 야간부 조각반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약 60점의 조각을 제작했는데, 초기 작품들은 로댕의 영향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 조각가로 인정받고 있는 앙투안 루이 바리의 영향도 보여준다.

1899년부터 마티스는 살롱전에 출품하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현대 미술을 창조하고 토론하는 파리 화단에서 점점 낯익은 인물이 되었다.

1901년에 그는 절충주의적 성격의 앵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처음으로 출품했는데, 이 전시회는 심사위원이 없는 공모전으로 보수적인 공식 미술전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화가들을 위해 1884년에 창설된 것이었다. 1902년에 그는 베르트 베유라는 작은 화랑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로의 화실 및 카리에르 학원에 함께 다녔던 많은 동창들과 함께 새로 창설된 살롱 도톤전(Salon d'Automne)에 참여했다.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살롱 도톤에서도 이들의 그림은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인정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경제적 위기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1900년에는 새로운 만국 박람회의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샹젤리제 구역에 건설중이던 그랑팔레를 장식하는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는 조금이라도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옷가게를 차렸다. 1901년에 마티스는 기관지염에 걸려 오랫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으며 1902년에는 세 아이(마르게리트, 장, 피에르)와 아내를 데리고 한동안 보앵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34세가 지난 1904년 6월에야 볼라르의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 개인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1905년 여름을 스페인 국경과 가까운 지중해 연안의 작은 어촌 콜리우르에서 앙드레 드랭과 함께 지냈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그는 스스로 점묘화법의 '폭정'이라고 부른 강박관념에서 급속히 해방될 수 있었다. 망막에서 뒤섞이게 하기 위해 작은 색면을 병치시킨 점묘파적 기법은 꿈틀거리고 활달한 자연스러운 붓놀림으로 전환했고, 사실주의적인 색채는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 노랑과 보라의 강렬한 보색대비로 바뀌었다. 새로 얻은 이 자유분방함이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콜리우르에서 완성한 〈열린 창 Open Window〉과 9월에 파리로 돌아와서 그린 아내의 초상화 〈모자를 쓴 여인 Woman with the Hat〉이었다.

이 2점의 작품은 그해 가을에 열린 살롱 도톤전에서 역시 강렬한 색채를 실험하고 있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는데, 비평가 루이 보셀은 이들을 '야수들'(les fauves)이라고 불렀고, 그리하여 20세기 미술에서 최초의 중요한 '이즘'인 포비슴, 즉 야수파가 탄생했다. 그리고 마티스는 이 집단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이 무렵부터 그의 경제사정도 호전되었다. 파리에 살고 있던 미국인인 스타인 가족(소설가 거트루드, 그의 형제들인 레오와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의 아내 세라)이 마티스 작품의 수집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1906년에 마티스는 앵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전에 다시 출품했을 뿐 아니라, 파리의 드뤼에 화랑에서 따로 개인전을 열었다. 1907년에는 세라 스타인과 한스 푸르만을 비롯한 후원자들이 그를 위해 레프트뱅크 미술학원을 만들었고, 그는 1911년까지 이곳에서 이따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에 그는 미국의 뉴욕 시와 소련의 모스크바 및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야수파는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야수파에 속했던 화가들은 곧 각자의 기질에 따라 표현주의나 입체파, 또는 일종의 신전통주의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마티스는 이런 경향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수'란 말이 단순히 순수한 색채를 좋아하는 화가를 뜻하는 용어라면 그는 평생 동안 야수파로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칠 만큼 합리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서, 자칫하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는 화풍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그는 야수파가 등장한 190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린 일련의 주요작품에서 계속 색채의 균형과 선의 단순화를 추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삶의 기쁨 Joy of Life〉(1906)·〈디저트, 붉은 하모니 The Dessert, a Harmony in Red〉(1908)·〈붉은 화실 The Red Studio〉(1911)·〈금붕어 Goldfish〉(1915)·〈피아노 교습 Piano Lesson〉(1916)·〈몽탈방, 커다란 풍경 Montalban, Large Landscape〉(1918) 등을 그렸다.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이런 작품들에서는 마티스의 성숙한 화풍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이 거듭 나타난다. 형태는 흐르고 미끈하고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부적인 묘사가 거의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색채는 넓은 영역에 걸쳐, 얇고 평면적이지만 밝게 칠해져 있으며 그림자는 사실상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리고 묘사된 공간은 극단적으로 평면화되어 원근법의 규칙이나 입체감을 내기 위한 관습적 생략기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한 장식미술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하고 자유분방하지만, 그림 전체의 효과는 이슬람의 양탄자나 직물 및 도자기의 무늬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재 선택과 그 처리 방법에서 낙천주의와 쾌락주의를 엿볼 수 있으며, 이들 소재는 지성과 관능을 동시에 암시해준다. 옷을 입은 여인뿐만 아니라 많은 습작물들이 있지만 판에 박힌 관습적 정취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코트다쥐르 시절

1912년에 마티스는 뉴욕 시에서 조각 전시회를 열었고, 쾰른과 런던에서 그림 전시회를 가졌다.

1913년에는 뉴욕 아모리 전시회에 13점의 그림을 출품해 많은 논란과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전시회가 시카고에서 열렸을 때는 〈푸른 누드 Blue Nude〉라는 그의 그림의 복사본이 화형에 처해지는 일이 벌어져 떠들썩한 선전효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 점점 유복해지는 경제사정, 이미 얻은 국제적 명성,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공개적인 소동에 대한 혐오 등으로 인해 그는 전위파의 중심에서 차츰 멀어졌다.

그는 프랑스 코트다쥐르에서 겨울을 나기 시작했고, 1920년대초에는 니스나그 주변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그 착상에 있어서 대담함이 사라졌고 절제적이었던 표현수단도 복잡해졌다. 그당시 대부분의 화가나 작곡가들(특히 파블로 피카소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과 마찬가지로 마티스도 일종의 현대화한 고전주의라고 할 수 있는 고전적 형식에 안주했고, 전위적 예술의 충격에 다소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예술 대중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러나 니스 시절의 전형적인 작품들 중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 Odalisque with Magnolias〉·〈장식적 무늬가 있는 인물화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Background〉 등은 인기를 누리고도 남을 만한 걸작들이다.

앙리 마티스 〈노란색 옷을 입은 오달리스크〉
앙리 마티스 〈노란색 옷을 입은 오달리스크〉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지런했다.

1920년에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gnol〉에서 무대 배경과 의상을 맡았다. 그는 또한 여러 해 동안 소홀히 했던 조각으로 돌아가, 1930년에 연작의 4번째 작품이자 가장 추상적 형태인 〈뒷모습 The Back〉을 완성했다. 여성 나체 부조인 〈뒷모습〉은 그가 1909년부터 이따금 다루어온 주제였다.

그는 항상 여행으로 긴장을 풀었다. 1921년에는 노르망디 해안의 에트레타, 1925년에는 이탈리아, 1930년에는 뉴욕 시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타히티로 갔다. 1933년에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파도바를 방문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메리언에서는 대규모 벽화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춤 Ⅱ The Dance Ⅱ〉(반스 재단 소장)를 완성하여 설치했다.

마티스는 파리에 간 초기부터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등의 판화기법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종종 많은 판화작품을 제작했다.

1932년에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Poésies〉 삽화로 29점의 에칭을 발표했는데, 그의 독특한 재능인 부드러운 윤곽과 경제적 선묘법은 말라르메의 시에 담겨 있는 '순수성'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그는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게 되었는데, 특히 앙리 드 몽테를랑의 〈파시파에 Pasiphaé〉(1944), 피에르 르베르디의 〈얼굴들 Visages〉(1946)·〈포르투갈 편지 Lettres Portugaises〉(1946),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Fleurs du Mal〉(1947), 피에르 드 롱사르의 〈사랑의 사화집 Floriège des Amours〉(1948), 그리고 샤를 도를레앙의 〈시집 Poèmes〉(1950)에 그린 삽화는 유명하다.

위의 책들은 주로 흑백 삽화로 제작되었으나,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재즈 Jazz〉(1947)를 출판하면서 화려한 색채 삽화를 곁들였는데, 여기서 이용한 기법을 그는 '가위로 그린 소묘'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림에 들어갈 소재들을 색종이(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불투명 수채물감으로 직접 칠한 종이)에서 잘라낸 다음 풀로 붙인 것이다.

마티스는 말년에 아내와 헤어지고 성장한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장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은 1941년부터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1950년부터는 천식과 심장병에 시달렸다. 그는 1930년대초에 그의 모델이었던 러시아 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니스가 내려다보이는 시미에의 레지나 호텔에 있는 널찍한 화실에서 살았다. 그는 화실에 놓인 침대에 누운 채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달은 크레용의 도움으로 벽화 크기의 대형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 창조력이 약해진 조짐이나 슬픔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그가 평생 동안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완숙하며 평화롭고 낙천적이다.

마티스는 코트다쥐르 언덕이 있는 방스에 1943년부터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1941년 중병에 걸렸을 때 그 지방의 도미니쿠스회 수녀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간호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 별장터에 도미니쿠스회 수녀들을 위한 로제르 예배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1948년에 설계를 시작해 3년 만인 1951년에 완공했다.

그는 우선 스테인드 글라스의 일부를 손수 도안했고, 그 다음에는 벽화를 그렸으며, 성직자의 의복과 예배용 물품을 비롯해 교회 안팎의 거의 모든 것을 도안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예배당이 완공되기 전에 그는 색종이를 오려 만든 거대한 작품(그가 〈재즈〉의 삽화에서 했던 작업을 확대한 것)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를 1950년대 초의 '가장 젊은' 화가이자,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