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마르셀

다른 표기 언어 Gabriel(-Honoré) Marcel
요약 테이블
출생 1889. 12. 7, 프랑스 파리
사망 1973. 10. 8,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마르셀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가이자 희곡 작가이다. 전통 종교보다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며 도덕적 양심이 판단기준이 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음악과 연극, 철학에 대해 관심을 두었으며, 어린 시절에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작곡하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형성했다. 자신의 가족상황을 생생한 모델로 삼은 희곡을 통해서 분명한 성격의 인물들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열망을 추구한 나머지 좌절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철학에 대한 초기의 관심은 일상 경험세계를 뛰어넘으려는 추상적인 사고방식 이었으나, 오랜 기간 조사와 연구를 하면서 점차 추상적 사고 아래 깔려있는 깊은 인간경험을 심화하고 다시 살려내려는 구체적인 철학이 되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철학의 자연주의적이고 유물론적 흐름에 도전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성장과정
  3. 활동영역
  4. 철학사상의 발전
  5. 주요주제와 방법

개요

최초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성장과정

정부 관리와 외교관을 지낸 앙리 마르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4세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마르셀에게 깊은 개인적 상실감과 아울러 계속되는 신비로운 현존(現存)의 느낌을 가슴에 새겨주었다. 이 사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죽음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것에 관해 절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할머니와 특히 아버지의 2번째 부인이 된 이모가 그를 키웠는데, 이모는 엄격하고 곧은 성격의 헌신적인 여성으로 초기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끊임없이 가족의 관심과 보호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나 이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가족들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학문적 성취를 요구했으며, 학교생활도 엄격하고 기계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개성적이고 강압적인 교육방식에 대해 평생 동안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외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어느 정도 위안을 얻었고, 아버지가 스웨덴 주재 프랑스 공사로 부임했을 때 아버지를 따라갔다.

이 방학 여행들을 계기로 그는 여행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이것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새로운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낯선 곳을 찾아다니려는 깊은 내면적 충동을 여행을 통해 채웠다. 말년에는 여러 외국어와 외국 문학에 정통했고 당시의 외국 작가들을 프랑스에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마르셀의 성장기 교육에 종교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톨릭 신앙을 버린 세련된 불가지론자여서 세례받기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독실하지 않은 유대인 출신의 의붓어머니는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전통 종교 대신 이성적·과학적·도덕적 양심이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 마르셀은 뒤에 이 시기를 돌아보면서 부모의 충분한 사랑과 염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예속'과 '속박'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인 종교적 탐구와 종교적 신앙의 조건에 관한 철학적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활동영역

그의 탐구는 음악·연극·철학의 세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작곡하는 것이 어린시절 마르셀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그의 정신적 성장에는 J. S. 바흐와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블레즈 파스칼 같은 위대한 종교적 사상가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작곡가로서 가장 좋아한 양식은 피아노 즉흥곡이었는데, 단순히 그 자신의 사적인 느낌이나 인상을 표현하기보다는 초월적인 실재와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즉흥곡 가운데 악보로 남겨진 것은 몇 편밖에 없다.

그러나 1945년 그는 통상적인 의미의 작곡가가 되었으며 샤를 보들레르에서부터 라이너 마리아 릴케까지의 시들을 작곡을 통해 음악적으로 해석하는 데 힘썼다.

극작활동은 또다른 면에서 초기의 중요한 표현양식이었다. 아버지 앙리 마르셀은 가족을 위해 자주 연극작품을 함께 읽는 시간을 마련했다. 어릴 때부터 마르셀은 상상 속의 형제·자매들과 나누는 대화를 만들어냈고 8세 때 처음으로 자신의 희곡을 썼다. 자신의 가족상황을 생생한 모델로 삼아 이후 그의 희곡은, 분명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열망을 추구한 나머지 좌절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인간생활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측면에 대한 연극적 묘사는 그의 음악이 표현하는 초월적 조화를 보완했으며, 이 2가지 면은 모두 그가 나중에 철학적 명상에서 탐구한 핵심적인 경험과 주제를 이미 다루고 있었다. 이 2가지 면은 사후(事後)에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사전(事前)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철학의 구체적 사례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은 흔히 말하는 '관념의 장난'에서처럼 활기찬 개념들을 기만적으로 조작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르셀이 직접 모든 실제 생활에서 만난 인물들의 극적인 정신적 위기들과 인간관계에서 떠오른 그의 철학적 주요관심사를 표현한 것이다.

마르셀은 〈은총 La Grâce〉·〈모래 궁전 Le Palais de sable〉·〈타인의 심장 Le Coeur des autres〉·〈우상파괴주의자 L'lconoclaste〉와 같은 초기 희곡에서 정신적인 본래성과 비본래성, 성실과 태만, 인간관계의 완성과 좌절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올림바장조의 4중주 Le Quatuor en fa dièse〉에서는 그의 음악적·철학적·극적 기질이 한데 어울려, 서로 얽혀 생활하는 사람들의 상호교섭의 의미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철학 논문 가운데 하나인 〈존재론적 신비〉를 희곡 〈깨뜨려진 세계 Le Monde cassé〉에 부록으로 넣었다. 이 연극 제목은 실의에 빠져 있지만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는 매력적인 주인공 여자의 공허한 생활상을 나타낸다.

철학사상의 발전

어린시절부터 마음을 빼앗긴 철학은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온통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일한 과목이었다.

18세 때 졸업논문의 주제로 〈셸링 철학과 관련된 콜리지의 형이상학적 사상〉을 잡고 소르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10년 중등학교의 철학교사가 되는 시험에 합격했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 마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이따금씩 철학을 가르쳤고 출판사의 교정원 및 편집인·작가·비평가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처음에 마르셀에게 철학이란 일상 경험세계를 뛰어넘으려고 애쓰는 고도의 추상적인 사고유형을 뜻했으나, 오랜 기간 조사하고 연구하는 동안 점차 추상적 사고 밑에 놓여 있는 깊은 인간경험을 심화하고 다시 살려내려는 구체적인 철학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적십자를 위해 실종된 군인을 찾는 일을 할 때 일어났다. 서류 카드에 있는 정보 대신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실질적인 개인(현존)을 보게 되었고, 그들 친지의 비통함을 함께 느꼈다. 마르셀이 '심령연구' 실험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의 철학적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초심리학적 현상). 이 실험은 텔레파시·투시력·예언·정신주의 등을 수단으로 가능한 의사소통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확신을 가지고 당시 철학의 자연주의적·유물론적 흐름에 도전했는데, 이 경험은 그에게 일상적인 감각경험을 넘어서는 영역을 일러주고 철학적 탐구에서 순응주의자들의 편견과 금지조항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원래 마르셀은 철학적 성찰을 전통적인 논문형식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자신의 철학적 소명이 본질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며, 철학자의 상황이 항상 탐색하고 도중(途中)에 있는 것(여행하는 인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 형식을 버리기로 했다.

대신 〈형이상학 일지〉, 그뒤 더 짧아진 철학 일기 〈존재와 소유〉·〈현존과 불멸성〉 등 자신의 철학적 탐구를 날마다 기록한 철학 연구일지를 출판했다.

또한 〈여행하는 인간 Homo Viator〉과 같은 특정한 주제나 특수한 경우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이 글들은 대체로 추방·감금·고립·성실·희망 등 원래 여러 일지에서 탐구한 사건의 주제를 더욱 매끄럽게 설명한 것으로 1940~44년 독일 점령기간 동안 프랑스인이 겪은 특수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정신생활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1929년 3월 23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이었다.

인간 실존과 신앙의 의미와 조건에 관한 철학적 탐구의 절정에 이르러 행한 이 선택은 보편적인 신앙이란 없기 때문에 특수한 형식의 신앙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었다(종교철학). 그는 본질적으로 비순응주의적이었으며 지적 자유를 요구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프로테스탄트교와 맞을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가톨릭을 선택했다.

그는 가톨릭을 특수한 교회제도나 교파적·배타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인 신앙으로 이해했다. 이 결정적인 사건 후에도 그는 결코 신학적 변론자나 공식적인 가톨릭 철학의 대변인이 아니라 특수한 정신적 기질을 지닌 독자적인 철학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그리고 철학뿐 아니라 연극에서도 계속해서 인간 경험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탐구하고 해명했다.

주요주제와 방법

마르셀은 현대 철학의 주요학파들이 철학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내던져버린 인간 경험의 전체 영역(신뢰·성실·약속·증거·희망·절망 등)을 탐구·해명한 점에서 현대 사상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탐구는 뛰어난 성찰력과 지적인 엄밀함, 특히 두드러진 형이상학적 능력이 뒷받침했다.

초기의 중심개념인 '참여'는 현실과의 직접 교섭을 뜻하는 것으로, 이 개념은 점차 발전하여 자신의 신체와 감각·지각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로부터 인간과 궁극적 존재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그 결과 존재들 사이의 충만하고 열린 관계는 본질적으로 '대화' 관계, 즉 '나'와 '너' 사이의 관계, 개인 전체와 그가 대면하는 존재의 충만함 사이의 관계로 인식되었으며, 여기서 이 다른 존재는 지각·사고·표현의 소원한 '대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존'과 '신비'로 여겨졌다.

이러한 관계는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게 개방적인 태도, 곧 '처분가능성'(disponibilité : '유효함', '준비를 갖춤', '잘 어울림' 등과 유사함)과 일상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성향인 '참여'(engagement:'관련맺음'이나 '개입')를 요구한다.

이러한 태도에 반대되는 것으로는 자신을 개방하고 몰두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 타인을 신뢰하거나 믿고 희망을 갖기를 거부하는 것, 부정·절망 심지어 자살을 지향하는 성향 등을 들 수 있다.

마르셀은 이러한 가능성을 인간조건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이해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있으며, 존재에 참여하여 그것을 충실하게 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마르셀이 이 문제들을 다루는 사고방식과 표현방법은 개방적이었고 직관적이었다. 그는 희망·성실성·증거와 같은 용어들의 의미를 탐색하거나, 희망을 가진 자, 성실한 자, 증인의 정신, 행위, 태도 등을 민감한 것까지 서술함으로써 용어들이 가리키는 현실을 묘사했다.

그는 또한 여러 가지 생생한 비유와 실생활의 사례들을 사용해 자신이 탐구하는 표현하기 어려운 경험과 실재를 표현하고 구체화하려 애썼다.

마르셀은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20세기 중반 현상학을 뚜렷하게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직관적 방법을 독창적으로 사용했으며, 독일의 위대한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이나 그의 추종자들의 저서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또 '나와 너' 관계라는 개념도 마르틴 부버나 다른 대화론적 사상가들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했으며, 실존적 주제에 관한 탐구도 키에르케고르를 읽기 훨씬 전에,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터져나온 실존주의 철학에 훨씬 앞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르셀은 비록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평가절하하기는 했지만 마땅히 프랑스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로 불린다.

마르셀은 1919년 자클린 뵈녜(1947 죽음)와 결혼했고 그녀를 "내 삶의 절대적인 동반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유일한 자식은 양자로 들인 아들 장 마리였는데, 아들과의 관계가 말년에 마르셀의 '창조적인 부성'과 입양정신에 관한 성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