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크네히트

리프크네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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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6. 5. 29, 프로이센 헤세 기센
사망 1900. 8. 7,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사회주의자.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카를 마르크스의 측근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을 창설했다(마르크스주의). 유년기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가정형편은 괜찮은 편이었다.

기센·마르부르크·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스위스에서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1847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848년 2월 23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코자 했으나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태가 수습된 뒤였다.

독일로 돌아가 수차례 민중봉기를 획책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으며 바덴에서 꺼져가는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려다 체포되어 8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1849년 석방되어서는 스위스로 떠났다.

리프크네히트는 스위스에 오래 체류하지 못했는데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이 증대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 정부가 그를 제네바로부터 추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849년 이후 13년간 런던에 머물렀고 〈아우크스부르크 신문 Augsburger allgemeine Zeitung〉의 런던 통신원으로 일하는 한편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하여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1862년 리프크네히트는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는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북독일 신문 Norddeutsche allgemeine Zeitung〉에 논설을 기고하면서 당대의 유력한 사회주의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862년 프로이센의 총리가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리프크네히트의 협력을 얻는 데 실패하자 1865년 추방령을 내렸다(비스마르크). 라이프치히로 옮겨간 리프크네히트는 1963년 페르디난트 라살에 의해 조직된 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전(全)독일 노동자동맹'에 참여했다.

이무렵 또한 목재선반공 아우구스트 베벨과 교분을 쌓게 되는데 도급을 위해 독일 전역을 돌아다녔던 베벨은 민중들의 비참한 실상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베벨). 작가 리프크네히트와 웅변가이자 실제적인 정치가였던 베벨은 상호보완을 이루어가면서 세기말까지 독일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라이프치히에서 리프크네히트는 사회주의 세력의 규합과 〈민주주보 Demokratisches Wochenblatt〉를 통한 대중계몽활동에 힘썼으며 1867년 북독일 의회에 진출하여 라살의 온정주의적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했다.

1869년 아이제나흐에서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을 창설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 이를 가입시켰다.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국제사회주의를 향한 리프크네히트의 헌신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전쟁공채안 투표를 거부하고 전쟁과 정부당국에 대하여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1872년 반역죄 혐의를 받아 기소되었고 동료 베벨과 함께 2년간 후베르투스부르크 요새에서 수형생활을 한다.

1871년 프로이센 군부는 파리의 점령에 성공했지만 사회주의 세력은 제국의회를 발판으로 성장을 계속했고 비스마르크에게 리프크네히트의 존재는 눈에 가시와 같았다. 총리의 억압정책이 강화되자 라살주의자와 리프크네히트의 추종세력은 고타에서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의 결성에 착수한다. 양 세력간 타협의 산물로서, 정부당국과의 협력을 통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내려 했던 고타 강령은 카를 마르크스의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이 채택될 때까지 독일 사회주의의 헌장으로 기능하게 된다(고타 강령). 새로운 강령은 고타 대회의 현실타협주의와 결별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 원칙으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1878년 제국의회에서 '반사회주의법'이 통과됨으로써 비스마르크 총리는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주의 탄압법은 언론검열과 사회주의 문학의 출판금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사회주의 노동당은 12년간의 탄압 속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혁명음모 대신에 교육·계몽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리프크네히트는 1890년 탄압법의 폐지와 함께 정당활동이 합법화되면서 가치를 입증받았다. 이듬해 에르푸르트에서 회동한 사회주의 노동당은 19세기 사회민주주의 이념의 총체라 할 새로운 헌장을 채택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을 발족시켰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남은 9년의 여생 동안 당 기관지 〈전진 Vorwärts〉을 통하여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대변했다. 쿠르트 아이스너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생애와 저작 Wilhelm Liebknecht, Sein Leben und Wirken〉(1900)은 좌파 사회주의 언론인이 쓴 가장 참고할 만한 전기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