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 강령

고타 강령

다른 표기 언어 Gothaer Programms

요약 1875년 독일 고타에서 채택된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의 강령.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두 조직체인 라살파와 아이제나흐파가 독일 사회주의 노동당을 결성한 고타 대회에서 채택되었으나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으로 대치되었다.

3월 혁명이후 잠시 주춤했던 사회주의 운동은 1863년 페르디난트 라살이 전독일 노동자동맹을 결성하면서 활기를 띠었다. 라살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헤겔의 이상주의적인 국가관을 지녔으며 이러한 라살의 국가주의는 라살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하나의 경향으로 남았다. 한편 이론적으로 보다 직접적인 마르크스의 지도하에 있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등은 1869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아이제나흐에서 별도로 사회민주노동당을 조직하여 라살파에 대항했다.

이 두 조직은 모두 기존의 자유주의를 탈피하여 노동자계급의 조직화를 기도하였으나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내용과 실천방법론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러한 노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라살파와 아이제나흐파가 제휴하게 된 것은 파리 코뮌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공조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사회주의노동당과 고타강령은 그 출발부터 상황논리에 따른 타협의 산물일 수 밖에 없었다.

강령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분석을 받아들여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는 점과 특정계급의 생산수단 독점이 모든 정치사회적인 불평등의 원인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정한 노동수익의 분배를 보장하는 노동해방, 정치경제적인 평등의 구현으로서의 사회주의 건설등을 당의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정치적 투쟁에서 합법적인 수단만을 사용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라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강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보통선거, 의회입법, 언론의 자유, 무료재판, 의무교육, 누진소득세, 노동조건의 개선, 공장입법 등을 포함했다.

고타강령은 급진좌파를 형성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며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라살의 개량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 Kritik des Gothaer Programms〉(1875)에서 라살주의와의 타협과 불철저한 강령의 채택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의 이행기, 이행기의 국가 유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주의 사회의 2단계 및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등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은 1890년 비스마르크의 퇴진과 함께 사회주의 진압법(1878)이 폐기됨에 따라 명칭을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바꾸었고 이듬해에는 새로운 단계에 적응할 목적으로 순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이 강령의 이론부분은 카를 카우츠키가, 실천부분은 에누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