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슈타인

베른슈타인

다른 표기 언어 Eduard Bernstein 동의어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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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0. 1. 6, 독일 베를린
사망 1932. 12. 18,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자본주의 체제의 임박한 붕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에 비판을 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알려졌다. 탁월한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개인이 혁신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를 제의함으로써 '수정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단치히에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으로 이주해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회민주당 가입과 동시에 베른슈타인은 당 기관지 〈미래 Die Zukunft〉와 관련을 맺었다. 1901년 베른슈타인은 성장하는 수정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란 자본주의 중산층에 대한 단순한 반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하는 자유주의 정신의 귀결점이었다. 1902년 베른슈타인은 제국의회에 진출했고 1928년까지 의정활동을 계속했다. 러시아 혁명(1917)에 굳이 반기를 들지 않았던 그는 1922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체제가 대두하자 이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베른슈타인은 나치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 나오는 지각 없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자본주의 체제의 임박한 붕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에 비판을 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다(마르크스주의). 탁월한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개인이 혁신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를 제의함으로써 '수정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단치히에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으로 이주해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기관사였고, 삼촌인 아론은 진보적인 노동자들 사이에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던 〈베를리너 폴크스 차이퉁 Berliner Volks-Zeitung〉지의 편집기자로 일했다. 에두아르트가 당시의 많은 지성인들처럼 국가의 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해 강렬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솔직했던 그는 은행원으로서 사회민주당 가입을 결심했을 때에도 동료·선배들의 호의를 잊지 않았다.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타도하고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는 혼란한 시대상황이 베른슈타인의 정치철학 형성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온유한 성격의 그는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보다는 독단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형태의 사회주의에 보다 큰 매력을 느꼈다. 베른슈타인은 권위주의적인 '전(全)독일 노동자협회'보다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노선의 '독일 사회민주당' 쪽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사회민주당 가입과 동시에 베른슈타인은 당 기관지 〈미래 Die Zukunft〉와 관련을 맺었다.

1873년에 시작된 경제적 위기가 189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더욱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가 '사회주의 진압법'을 도입하자 보다 급진주의적인 성향으로 기울어갔다. 추방명령이 내려지고 베른슈타인은 〈미래〉의 후원자 카를 회흐베르크의 '윤리적 사회주의'와 결별한 채 스위스로 발길을 옮겼다.

스위스에서 베른슈타인은 카를 마르크스의 동의하에 사회주의 지하정당들의 구심점이 되어온 〈사회민주주의 Der Sozialdemokrat〉의 취리히 판(版) 편집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1888년 비스마르크의 요청을 받아들인 스위스 당국에 쫓겨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이번에는 영국으로 옮겨갔다. 런던에서 베른슈타인은 〈사회민주주의〉의 편집을 계속하는 한편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밀접한 교분을 쌓았으며, 점진적인 사회주의의 발전을 지향하고 있던 '페이비언 협회'의 지도자들과도 접촉을 가졌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일련의 논설과 독일 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1898)에 보내는 서한을 통해 자신의 새로워진 입장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베른슈타인의 역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가 출간되었다.

1901년 독일로 귀환할 즈음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성장하는 수정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란 자본주의 중산층에 대한 단순한 반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하는 자유주의 정신의 귀결점이었다. 베른슈타인은 더이상 자본주의 체제의 임박한 붕괴를 믿지 않았으며 부르주아지를 병적이고 억압적인 계급으로도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산업의 집중화가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모든 분야에서 완전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공장입법이나 노동조합운동의 합법화와 같은 개혁사례들을 열거하면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운동의 비판 아래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성향에 대한 일단의 반작용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했다.

결국 지속적인 승리의 방법론이란 물리력을 동반하는 봉기가 아니라 한 단계 한 단계의 전진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1902년 베른슈타인은 제국의회에 진출했고 1928년까지 의정활동을 계속했다. 수정주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며, 카를 카우츠키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노동운동가 아우구스트 베벨의 절충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퇴조의 기미를 보였다.

계급간의 무력충돌뿐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 또한 반대했던 그는 당내 좌파의 반군국주의 투쟁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익의 지도자로서 사회민주당의 전쟁지지에 반발,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노선에 보조를 맞추었다.

종전이 이루어진 후 다시 당에 복귀한 베른슈타인은 이번에는 1918년 11월의 위기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려는 좌파의 급진노선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베른슈타인은 의회제 공화국의 출범만이 꾸준한 진보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1919년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재무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그가 20년 이상을 희구해왔던 대로 사회민주주의는 보편적인 개혁주의 운동으로서 마침내 확고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고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전체 당의 존경을 받는 원로자문관으로서 대부분의 개혁 프로그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 혁명(1917)에 굳이 반기를 들지 않았던 그는 1922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체제가 대두하자 이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베른슈타인은 나치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 나오는 지각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치당의 불법적인 정치활동과 권력장악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베른슈타인이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던 민주주의 국가는 그가 사망한 지 채 6개월이 못 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무단독재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