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벨

베벨

다른 표기 언어 August Bebel
요약 테이블
출생 1840. 2. 22, 쾰른 근처 도이츠
사망 1913. 8. 13, 스위스 파수크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사회주의자.

독일 사회민주당 창당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40년 넘게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한 대중적 지도자로 서유럽 사회주의 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꼽힌다.

프로이센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베츨라어의 극도로 궁핍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선반기술을 배우고, 품팔이 기술자로서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돌다가 1860년 봄 라이프치히에 정착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61년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 가입해 1865년 회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비슷한 여느 단체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부르주아들의 발기로 탄생했으나 정치·경제 상황으로 말미암아 노동자 교육운동은 점차 정치교육의 색채를 띠어 베벨의 정치관은 이러한 노동자 교육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 생긴 여러 단체의 젊은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도 베벨은 〈공산당 선언 The Communist manifesto〉이나 그 저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1863년 당시 그는 노동자계급이 선거권을 행사할 만큼 성숙했다고는 믿지 않았으나 1865년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로 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생각을 바꾸고 있었다. 리프크네히트는 베벨보다 나이도 많고 대학교육도 받았으므로 여러 모로 베벨의 스승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더욱 개방적인 성격을 지녔던 베벨은 항상 자기의 독자성을 지켜나갔다.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 독일의 여론은 소(小)독일주의(Kleindeutschland)와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창한 대(大)독일주의(Grossdeutschland)로 나뉘었다. 노동자들의 지도자인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에게 비스마르크는 화해할 수 없는 적이었으므로, 작센의 여러 노동자 단체는 급진적인 반(反)프로이센 민주주의자들과 제휴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이리하여 작센 인민당(ächsische Volkspartei)이 생겨났으며, 1867년 베벨은 작센 인민당 당원으로서 북독일연방 제국의회(Reichstag)로 진출했다. 마침내 1869년 비슷한 견해를 가진 여러 당이 연합해 독일의 사회민주노동당을 탄생시켰다.

베벨은 이미 1867년부터 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서 비스마르크가 내세운 '더욱 위대한 프로이센'이란 '독일을 하나의 커다란 병영(兵營)으로 만드는 것'이라 보고 이 정책에 저항해왔다.

독일 제국이 성립되기 전이나 성립된 뒤에도 그는 의회에서 반대를 계속했다. 그와 리프크네히트만은 1870년 7월 21일 제국의회에서 실시된 전쟁자금 대부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그결과 이들은 1872년 3월 라이프치히에서 중반역죄로 재판받았다. 2년형을 선고받고 어쩔 수없이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결핵에서 회복되었으며 스스로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 1869년에 받은 형까지 합하면 그는 20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모두 5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국가에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 죄', '불경죄', '비스마르크에 대한 명예훼손', 또는 '연방의회의 명예훼손' 등 가벼운 것이었다. 선고를 받을 때마다 그의 생계는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당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경비만을 부담해줄 뿐이었고 제국의회 의원 수당도 받지 못했으므로 그는 기술자로서 벌어들이는 수입에 계속 의존해야 했다.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숙련된 선반공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1864년 철도노동자의 딸과 결혼했다. 1880년대말부터 비로소 저술활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작가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은 〈여성과 사회주의 Die Frau und der Sozialismus〉(1883)인데 이것은 그후 중판되었으며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수십 년 동안 사회민주당의 선전물로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비스마르크가 반사회주의법(1878~90)을 제정한 상황에서 과학과 예언을 결합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청사진 역할을 했다. 그는 이 긴급법 아래의 억압시기는 하나의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제국의회에서 반대파들에게 "마치 유리가 화강암에 부딪쳐 부서지듯 그대들의 창(槍)은 이 싸움에서 박살나고 말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신념은 동료들에게 확고하게 뭉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테러리즘이나 전복 기도는 당의 존재 여부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무력 보복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긴급법이 소멸되고 1890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거의 20%의 지지표를 얻음으로써 그의 이런 전략은 옳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당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는 이제 확고부동해졌으며 제국의회에서도 그는 가장 강력하게 정부를 반대하는 입장이 되었다. 당 내부에서는 반사회주의 법이 사라진 뒤부터 공공연히 등장한 모든 기회주의적 경향에 반대했다. 기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건설할 때까지 기존의 사회정치구조의 특성을 서서히 발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1891년 에어푸르트 당대회에서 그는 바이에른 사회민주당 지도자인 게오르크 폰 폴마어에 대해 '우리 당이 존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사회민주주의의 '영감'을 저버렸다며 질책했다.

1890년대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주창한 수정주의 이론 및 활발한 개혁주의에 대항한 싸움은 1903년 드레스덴 당대회에서 절정에 올랐다. 그는 당의 공식적 급진 원칙에서 벗어난 모든 이론을 비난한 동시에 의회 밖의 활동을 요구하는 좌익 세력의 압력에 굽히지 않았다.

그결과 그는 다시 한번 당이 탄압받을 수도 있는 상황을 모면했다. 그의 입장은 선거 때마다 새로운 추종자들을 얻음으로써 정당화되었고, 마침내 1912년 그는 생전에 당이 제국의회에서 최대 의석(110석)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베벨이야말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통을 구현한 사람이다. 엥겔스는 1882년 그를 "독일 노동자계급의, 더 나아가 유럽 노동자계급의 전형적 화신(化身)"으로 묘사했다. 1867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제국의회 의원으로 지내면서 그는 의원으로서 최고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적들조차도 그의 열성적인 성실성 앞에서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동시대의 정치가 헬무트 폰 게를라흐는 정치를 하면서도 그는 하루하루 겨우 먹고 살았다고 시사하며, "그의 정치적 목표는 가장 먼 미래가 아니면 바로 닥칠 현실을 위한 것이었고 그 사이에 놓여 있는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 자신이나 자기가 대표한다고 생각했던 사회민주당 지도부에게 정치활동이란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사회 이익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미래지향적인 혁명적 정서와 현재에 뿌리를 둔 사회정책 사이의 서로 모순되는 결합은, 새로운 독일 제국에서 그의 당이 놓여 있던 모호한 입장을 반영해준다. 이것은 당 내에서 그의 강력한 지위와 독일 사회민주당의 소극적 정치태도를 상당 부분 설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당의 태도는 그가 죽기 전에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독일 제국이 붕괴되어 당이 처음으로 커다란 정치적 시험에 맞부딪혔을 때 두드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