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살

라살

다른 표기 언어 Ferdinand Lass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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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5. 4. 11, 프로이센 브레슬라우
사망 1864. 8. 31, 스위스 제네바 근처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사회주의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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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하츠펠트 백작부인과의 만남
  4. 라살과 비스마르크
  5. 참정권 투쟁
  6. 평가

개요

1848년 이후 카를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었으며 초기 독일 노동운동을 지도했다.

초기생애

아버지 하이만 라살(혹은 로슬라우어)은 유대인으로 비단도매업에 종사했으며 시의원을 지냈다.

브레슬라우 인문고등학교 재학시절 성적표의 사인을 위조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한 뒤 1840년 라이프치히 상업학교에 입학했고 1843년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일기에 따르면 라살('Lassalle'이라는 그의 이름표기는 1846년의 파리 체류기간 동안 비롯되었음)은 그무렵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격정 속에 살고 있었다. 그는 한편에서 "나는 점원으로 생계에 뛰어들기 위하여 삶의 아름다움을 포기했다"라고 썼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이제야말로 인류애의 대의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때다"라고 쓰고 있다.

1843~44년 라살은 브레슬라우대학교에서 철학·역사학·문헌학·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845년 브레슬라우에 체재했던 잠깐을 제외하고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이 베를린 시절(1844~45) G. W. F. 헤겔과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그리고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에 접하게 된다. 1845~47년에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테제로 학위와 강사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으며 파리에서 사회이론가 조제프 프루동 및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조우하게 되었다.

하츠펠트 백작부인과의 만남

1846년 라살은 뒤셀도르프에서 조피 하츠펠트를 만났다.

불운한 결혼생활로 고통을 받고 있던 그녀는 하츠펠트 백작과의 이혼을 마음먹고 있었고 라살은 35차례의 소송을 추진한 끝에 조피의 이혼을 성사시켰다. 조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매년 4,000달러의 생활보조금을 지불했으며 이 연금은 그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평생에 걸친 조피와의 인연은 사실 아들과 양어머니 사이의 관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끊임없는 풍문을 몰고왔으며 그의 정치경력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1848~57년 라살은 뒤셀도르프에 거주했고 1848~49년 독일혁명에 가담했다(1848년의 혁명). 독일의 중산계급은 입헌군주국가의 건설을 통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시민권의 획득을 갈구하고 있었다. 1848년 11월 라살은 민병대를 선동, 무력봉기를 촉발시켰고 이듬해 7월 제국법정에 회부되었다.

그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즈음의 일이다. 라살은 혁명기간 동안 끝내 조국을 버리지 않은 몇 안 되는 급진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검거와 기소, 구형들로 이어지는 뒤셀도르프에서의 생활은 문필활동과 노동조합운동 등을 통하여 행복한 나날들로 바뀌어갔다. 독일혁명 실패 후의 반동적 시기에 라살은 스위스와 파리의 만국박람회를 돌아보고 1856년에는 중근동을 여행했다.

1859년 완성을 본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수고(手稿)와 비극 〈프란츠 폰 지킹겐 Franz von Sickingen〉은 위대한 인물에게 역사전환의 숭고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었다.

라살과 비스마르크

1857년 라살은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2년후 영구정착하여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카를 마르크스와는 1861년 재회가 이루어져 서신왕래가 계속되었으나 점차 관계가 소원해졌다.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달리 라살은 이미 혁명적 기운은 소멸되고 없으며 오직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수단만이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를 기약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1863~64년 이러한 사고의 바탕 위에서 라살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비스마르크는 라살이 사망한 14년후에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페르디난트 라살은 내가 아는 가장 지적이고 매력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대단한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결코 공화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1860년대초의 난국수습을 위하여 다수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할 제휴세력을 찾고 있었고 라살은 군주제라는 틀 속에서 복지국가의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라살의 구상은 상류계층에만 유리한 기존 선거권 대신 3계급 모두의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노동자계급을 정치·사회적으로 결집시킴으로써 사유재산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 국가를 입헌민주주의국가로 전환시키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와 라살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곧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라살의 경우 카리스마적 인품과 그의 가부장적 민주주의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당시의 독일인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1862년 라살의 사고에 위기가 닥쳐왔다.

그의 예상을 벗어나 주세페 가리발디의 이탈리아 봉기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한 것이다. 베를린은 더이상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강연이나 팜플렛 배포만으로는 소기의 결실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라살은 자신의 정치목표를 대중들에게 홍보하기 위하여 노동자연합체들을 겨냥한 직접선동에 나섰다. 한편 비스마르크 총리의 의회탄압은 라살이 자신의 자유주의의 신념을 재검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라살은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독일의 입헌주의에 관한 한 연설에서 아래와 같이 새로워진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입헌주의의 문제는 법규제정과 개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정치권력의 문제이다".

참정권 투쟁

1862년 12월 라살은 '전독일 노동자동맹 창설을 위한 중앙위원회' 집행부의 요청으로 협회의 강령을 작성하게 되었다.

라살은 단번에 노동자동맹이 참정권 투쟁의 전위대로 기능할 수 있음을 간파해냈다. "노동자들이여, 노동자동맹을 형성하자! 직접·보통선거권의 확보를 위해 합법적이고 평화롭게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써 마지막까지 싸움을 계속하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치켜들어야 할 혁신의 깃발이며 우리 노동자들은 이 깃발 아래서 기필코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이다!"

1863~64년 라살은 특히 라인란트에서 노동자계급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내게 의미를 갖는 것이란 노동자계급밖에는 없다"라고 설파했다. 1863년 5월 23일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 노동자동맹(ADAV)이 정식 발족되자 라살은 5년 임기의 협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쾰른에서 사회주의 이론가 모제스 헤스와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그의 권위주의적 지도방식과 개인숭배에 불만을 품은 다수의 동료·측근들이 이탈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라살의 선동적인 발언들은 곧잘 법정문제로 비화되었다. 수년간의 선전활동이 이렇다 할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자 기진맥진해진 라살은 1864년 휴양차 스위스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매력적인 헬레네 폰 되니게스를 만났다. 열정적인 구혼이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라살은 헬레네의 약혼자 얀코 폰 라코비차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8월 28일 제네바 근처의 숲속에서 결투가 이루어졌다.

복부에 상처를 입은 라살은 이로부터 3일 뒤에 사망했으며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평가

당시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역사에 의해 예정된 불변의 진리였기 때문에 페르디난트 라살에게는 이후 오랫동안 '수정주의 이단자'라는 오명이 붙어다녔다.

라살의 사회주의 시각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사회민주당이 대의제 민주주의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강령으로 내세운 수정주의 시대 이후의 일이다. 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로 슈미트가 지적한 것처럼 페르디난트 라살의 중요성은 인간해방과 인간소외극복을 역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로 인식한 그의 통찰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