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레이

다른 표기 언어 John 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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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27. 11. 29, 잉글랜드 에식스 블랙노틀리
사망 1705. 1. 17, 블랙노틀리
국적 영국

요약 분류학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분류학의 기본단위로서 종(種)의 개념을 확립하여 식물학에 오래도록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660년 그는 케임브리지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의 목록을 처음으로 출판하면서 박물학자로서의 작업을 시작하였다. 1662년 그는 프랜시스 윌러비와 함께 웨일스와 콘월을 탐사하였는데, 그들은 살아 있는 생물에 대한 자연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레이는 식물계를 맡고 윌러비는 동물계를 맡았다. 1663~66년 동안 계속된 대륙여행으로, 이때 레이는 동물상과 식물상에 관하여 산 지식을 얻었다. 영국에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시작하였는데, 레이는 미들턴에 있는 윌러비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으며, 1670년 〈영국식물목록〉을 펴냈다. 1682년 분류에 관한 〈새로운 식물 연구 방법〉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의 차이점에 관한 분류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외떡잎식물은 씨에서 싹이 나올 때 1장의 잎만 나오나, 쌍떡잎식물은 2장의 떡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간은 곤충들을 관찰하면서 보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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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중요한 출판물

개요

분류학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동료이자 박물학자인 프랜시스 윌러비(1635~72)와 함께 웨일스와 콘월을 탐사하였으며, 나중에 살아 있는 생물의 자연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분류학의 기본단위로서 (種)의 개념을 확립하여 식물학에 오래도록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생애

블랙노틀리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근처 브레인트리의 그래머스쿨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당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가난한 장학생을 후원하기 위해 위탁된 자금으로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1644년 케임브리지대학교 칼리지 중의 하나인 캐서린홀에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1646년에는 트리니티 칼리지로 옮겼다. 그에게 다시 행운이 찾아왔다.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기에 마침 좋은 때에 케임브리지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해부학과 화학을 같이 공부할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1648년 학사학위를 받고 다음해에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뽑혔으며, 그뒤 13년간 성당학교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주어진 교과과정을 이수해나갔다.

레이의 계속된 행운은 왕정복고로 끝이 났다. 그는 열성적인 당원은 아니었으나 청교도정신에 투철했으며, 통일령에 따라 반드시 하게 되어 있는 선서를 거부하였다. 1662년 그는 특별연구원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개인 지도교수로 있으면서 가르쳤던 학생들 중 부유한 학생들이, 레이가 박물학자로서 그의 일을 계속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43년간 도와주었다.

1660년 그는 케임브리지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의 목록을 처음으로 출판하면서 박물학자로서의 작업을 시작하였다. 9년 동안 이 목록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연사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또한 케임브리지 지역의 식물에 대하여 철저히 연구한 다음, 영국의 다른 지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662년 그는 프랜시스 윌러비와 함께 웨일스콘월을 탐사하였는데, 이때는 레이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쫓겨날 절박한 처지에 있었던 인생의 전환기였다. 부유한 워릭셔 가문의 윌러비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시절부터 레이의 자연사에 대한 열정에 대해 감동을 받아온 터였다. 그들은 살아 있는 생물에 대한 자연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을 시작하였는데, 레이는 식물계를 맡고 윌러비는 동물계를 맡았다.

윌러비가 레이에게 물질적으로 지원을 한 것은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획의 첫번째 단계는 1663~66년 동안 계속된 대륙여행으로, 이때 레이는 동물상과 식물상에 관하여 산 지식을 얻었다. 영국에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시작하였는데, 레이는 미들턴에 있는 윌러비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으며, 1670년 〈영국식물목록 Catalogus Plantarum Angliae〉을 펴냈다.

1672년 윌러비가 갑자기 죽자 레이는 그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신성한 마음으로 그들의 계획을 완성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윌러비가 자신에게 남긴 60파운드의 연금과 윌러비 아이들의 가정교사 자리가 도움이 되었다. 1676년 레이는 윌러비 못지 않게 일했으면서도 윌러비의 이름으로 〈F. 윌러비의 조류학 F. Willughbeii……Ornithologia〉(1678)을 출판하였다. 윌러비가 죽은 뒤에도 계속 레이를 뒷받침해주던 윌러비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레이는 이미 〈F. 윌러비의 어류의 역사 F.Willughbeii……de Historia Piscium〉(1685)에 관해 집필하고 있었다.

윌러비의 아내는 레이와 그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 즉시 그에게 집을 떠나라고 하였다. 그가 〈F. 윌러비의 어류의 역사〉를 완성한 뒤에도 윌러비의 아내는 그 책의 출판을 도와주지 않아 결국 레이가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던 왕립학회가 출판하게 해주었다.

그는 고향인 블랙노틀리로 되돌아와서 1673년 윌러비 집에서 일하던 젊은 여자 가정교사 마거릿 오클리와 결혼하였다.

11년간 아이들이 없다가 네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들은 애벌레와 나비들을 채집하여 그에게 가져와서는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는 젊은 과학자들과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연구하기에 적당한 도서관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한 다리의 상처와 되풀이되는 설사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지만, 그는 온 정열을 쏟아부어 놀랄만큼 방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룩했다.

중요한 출판물

레이는 식물학 연구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1682년 분류에 관한 〈새로운 식물 연구 방법 Methodus Plantarum Nova〉(1703 〈식물 연구 방법 2판 Methods Plantarum Emendata……〉으로 개정)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의 차이점에 관한 분류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외떡잎식물은 씨에서 싹이 나올 때 1장의 잎만 나오나, 쌍떡잎식물은 2장의 떡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가 식물학에 남긴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업적은 분류학의 기본단위로서 종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것이다.

〈식물 연구 방법〉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식물의 역사 Historia Plantarum〉(3권)를 1686~1704년에 걸쳐 내놓았다. 처음 2권이 나온 다음 그는 완벽한 자연 분류체계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결과 영국과 유럽산 식물의 간략한 개요를 편집하였는데 〈조류와 어류 개요 Synopsis Methodica Avium et Piscium〉(1713, 레이가 죽은 다음 출판)·〈네발동물의 개요 Synopsis Methodica Animalium Quadrupedum et Serpentini Generis〉(1693)가 바로 그 책들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간은 곤충들을 관찰하면서 보냈다.

그것은 곤충 연구에 있어 개척자적인 일이었으며 그가 죽고 난 뒤에 〈곤충의 역사 Historia Insectorum〉가 출판되었다. 그는 분류학의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한 가지 특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해부학적 특징들을 포함한 모든 구조적 특징들을 바탕으로 분류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허파와 심장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포유동물을 하나의 강(綱)으로 확립하였으며, 변태의 유무에 따라 곤충들을 분류하였다.

다윈 이전의 시대에는 분류학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자연체계 확립이 불가능하였지만, 레이의 분류체계는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인위적인 분류체계보다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 세대의 린네가 이룩한 업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항상 "신학이 내 전공이다"라고 주장하였으며, 1690년대에는 종교에 관해 쓴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느님의 지혜 The Wisdom of God Manifested in the Works of the Creation〉(3권, 1691)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그가 생물들을 연구하면서 느낀 모든 것들을 자연종교적 입장에서 쓴 수필로, 그의 저서로는 가장 널리 읽히고 큰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이 책은 생물 고유의 형태와 기능의 상호관계는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창은 17세기의 주요 과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제기되었던 것으로 자연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나타날 진화사상이 발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레이는 〈곤충의 역사〉를 쓰다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