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동요

다른 표기 언어 童謠

요약 서양의 동요는 교육이나 보육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커서 한자사용권에서보다는 동요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동요는 1598년 기록에 남아 있는 〈먹국먹국 어느 손에 있게?〉이다. 〈무당벌레야, 무당벌레야 집으로 날아가렴〉, 노래부르기 노래인 〈런던 다리가 와르르 〉, 수수께끼 노래인 〈땅딸보〉 같은 노래는 유럽 각지에 유사한 형태로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데 그 뜻을 정확히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구전된 듯하다. 한국에서는 동요가 독특한 한 장르로 형성되어왔으며 어린이뿐 아니라 여러 층에 두루 애창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매스컴을 통한 대중가요가 대중의 정서를 전반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의 애창곡도 대중가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목차

접기
  1. 전래동요
  2. 창작동요

노랫말뿐만 아니라 곡조도 동요라고 한다. 동시가 정형적인 형식이나 리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반면 동요는 일종의 정형시로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1920년대 이전에는 구전동요(전래동요)가 4·4조, 7·5조의 운율을 지켜오다가 그 이후 창작동요가 모습을 보이면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보다 신선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어린이들이 직접지어 부를 수도 있으나 어린이를 위해 어른이 지어주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런 작품들이 일정한 문학적 성향을 띠어 아동문학의 한 장르를 이룬다.

동요라는 말은 한국·중국·일본 등과 같은 한자사용권의 나라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다. 영어사용권의 나라에서는 '어린이의 노래'(Children's Song) 또는 '유아의 노래'(Nursery Song, Nursery Rhyme)라는 말을 쓰지만 동요의 범주가 명확한 것은 아니다. 서양의 동요는 교육이나 보육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커서 한자사용권에서보다는 동요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 미국에서는 '마더 구스의 노래'(Mother Goose's Song) 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동요는 1598년 기록에 남아 있는 〈먹국먹국 어느 손에 있게? Handy, dandy, prickly, which hand will you have?〉이다. 〈무당벌레야, 무당벌레야 집으로 날아가렴 Ladybird, ladybird fly away home〉, 노래부르기 노래인 〈런던 다리가 와르르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수수께끼 노래인 〈땅딸보 Humpty-Dumpty〉 같은 노래는 유럽 각지에 유사한 형태로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데 그 뜻을 정확히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구전된 듯하다. 또 이러한 동요들은 구전되는 동안에 새로운 말이 첨가되거나 변화되기도 했다.

런던 다리가 와르르(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런던 다리가 와르르(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서양의 전래동요는 15세기 이전 것은 드물고 18세기 것이 가장 많다. 최초로 출판된 동요집은 1744년 런던에서 펴낸 2권으로 된 〈타미 섬의 노래책 Tommy Thumb's (pretty) Song Book〉이다. 이 책에는 〈꼬마 톰 터커 Little Tom Tucker〉·〈6펜스의 노래 Sing of Six-pence〉·〈누가 수탉 로빈을 죽였나? Who Killed Cock Robin?〉 등이 실려 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요집은 1781년 존뉴베리사가 출판한 〈마더 구스 동요집 Mother Goose's Melody : or Sonnets for the Cradle〉이다. 이 책에는 〈잭과 질 Jack and Jill〉·〈딩동댕 종소리 Ding Dong Bell〉를 비롯해 51곡의 노래가 실려 있다.

한국에서는 동요가 독특한 한 장르로 형성되어왔으며 어린이뿐 아니라 여러 층에 두루 애창되었다. 한국동요는 크게 전래동요와 창작동요로 나눌 수 있다. 전래동요는 구비문학에 속하여 내용도 유희를 하면서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고 입과 귀로 전해지면서 변화되어 공동참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창작동요는 근대에 들어와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동극·동화 등과 더불어 아동문학의 한 범주에 해당된다. 창작동요는 일단 개인에 의해 창작·발표되면 더이상 변화되지 않는다.

동요는 민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노동요나 의식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창작동요가 만들어진 때는 1920년대부터이고 그 이후로 많은 동요가 창작되었는데 최근에는 전래동요는 거의 불려지지 않고 창작동요도 몇몇 경연대회나 교과서에서 나타날 뿐 실제 어린이들에게는 많이 애창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매스컴을 통한 대중가요가 대중의 정서를 전반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의 애창곡도 대중가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한국의 전래동요와 창작동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래동요

전래동요
전래동요

구전동요라고도 한다. 한국의 고유음계인 5음음계(라도레미솔)로 된 노래로 그 시대의 사회상과 민족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전래동요는 가곡·시조를 불렀던 양반과는 계층이 다른, 민요·잡가·향가를 불렀던 서민의 자식들이 주로 불렀으며, 민요에서 비롯된 토속적인 정취가 담겨 있다.

노랫말은 어린이들만의 것이 아닌 어른도 함께 부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때문에 동요와 민요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문헌상으로 가장 오래된 동요는 상고시대의 〈구지가 龜旨歌〉이고 그 다음으로는 삼국시대의 〈서동요 薯童謠〉이다.

가사의 내용은 조상·부모·형제나 꽃·나무·새 등의 자연을 소재로 한 것, 또는 사회적 모순과 비리를 풍자·비판한 내용 등이 있다. 전래동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작되거나 소멸되기도 했는데, 오늘날까지 전래되는 동요에는 〈술래잡기〉·〈자장가〉·〈달아 달아 밝은 달아〉·〈할미꽃〉·〈파랑새〉·〈까까중〉·〈숫자풀이〉·〈두껍아 두껍아〉·〈꼬마야 꼬마야〉 등이 있다.

창작동요

창작동요는 민요와 상관없이 발생하여 독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창작동요가 나타난 때는 1920년대이다. 1922년 방정환(方定煥)은 도쿄에서 음악대학을 다니던 윤극영(尹克榮)과 함께 색동회를 결성했다. 그뒤 두 사람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했다. 1924년 윤극영은 〈반달〉을 작곡하고 최초의 노래단체인 달리아회를 직접 지도했다. 1926년 그가 작곡한 동요를 모아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을 펴냈다. 이에 앞서 동요를 작곡한 사람은 박태준(朴泰俊)이었는데, 그는 1925년부터 본격적인 동요작곡과 발표에 열의를 보였다.

박태준이 작곡한 동요는 〈오뚜기〉·〈오빠 생각〉 등이다. 1923년부터 〈어린이〉에는 많은 동요·동시가 발표되었는데, 가사는 주로 윤복진(尹福鎭)·신고송(申孤松)·이원수(李元壽) 등이 발표했다. 또 동요 작사로 유명한 사람은 윤석중(尹石重)이다. 그는 13세부터 동요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꽃밭사·굴렁쇠 등의 동요문인의 모임을 이끌었다. 1927년 홍난파는 동요 가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냈는데, 당시는 윤극영과 박태준이 동요 작곡을 주도하고 있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29년 홍난파가 펴낸 〈조선동요 100곡집〉에는 〈고향의 봄〉·〈낮에 나온 반달〉·〈퐁당퐁당〉 등이 실려 있다. 박태준은 〈중중 때때중〉(1929)·〈양양 범버궁〉(1931)을, 정순철은 〈갈잎 피리〉라는 동요곡집을 펴냈다.

1930년대 색동회 회원으로 있던 정인섭(鄭寅燮)과 이헌구(李軒求)는 '녹양회'(綠陽會)라는 동요·동극 단체를 만들었고, 같은 해 한국 최초의 유치원인 이화유치원에서도 〈유희 창가집〉을 펴냈다.

1936년 경성보육학교에서 펴낸 〈유치원용 동요집〉은 수록된 곡의 2/3가 일본동요여서 한국동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에는 〈어린이〉·〈신생활〉·〈아이생활〉을 비롯한 잡지뿐 아니라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에서도 어린이 특집란을 만들어 우수한 동요를 발표했다. 1933년 이흥렬(李興烈)은 이은상이 꾸민 동요극 〈꽃동산〉의 주제음악인 〈꽃동산〉을 비롯한 20여 곡을 작곡했다. 그밖에 현제명(玄濟明)·김성태(金聖泰)·김동진(金東振)·이일래(李一來)·강신명(姜信明) 등도 동요 작곡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가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서 한국을 식민지화하자 동요는 단 1편도 작곡되지 않았고 동요 대신 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해방 직후 처음 나온 동요는 박태준 작곡, 윤석중 작사의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또 '봉선화 동요회'의 주요인물인 안병원(安丙元)은 〈우리의 소원〉을 작곡했고 권길상(權吉相)은 〈과꽃〉을 작곡했다. 1946년 윤석중은 '노래동무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날〉의 가사를 지어 안기영(安基永)에게 곡을 부탁했다.

이 노래는 1948년 윤극영이 다시 작곡했다. 1948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문교부 편찬의 교과서에는 김메리의 〈학교종〉, 함이영의 〈우리나라꽃〉 등이 실려 널리 불렸다. 6·25전쟁 때에는 전시 동요가 많이 작곡되어 〈공군아저씨〉·〈대한의 아들〉·〈위문편지〉 등이 발표되었다. 1952년 이화여자중학교에서 주최한 전국 국민학교 음악 콩쿠르, 1954년 KBS방송국에서 주최한 방송어린이음악 콩쿠르 등이 개최되었고, 1955년 KBS 어린이합창단과 윤석중의 새싹회합창단이 조직되어 동요 발전의 계기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에는 서울소년합창단·선명회어린이합창단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반달〉·〈고향의 봄〉 등의 노래비가 전국에 세워졌다.

1977년에는 한국의 아동음악에 기여한 음악인 교육자에게 '한국아동음악상'이 수여되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미 어린이음악회'가 열렸고 동요 부흥운동 차원에서 '동요 부르기 캠페인' 등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