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구

이헌구

다른 표기 언어 李軒求 동의어 소천, 宵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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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5. 5. 12, 함북 명천
사망 1983. 1. 4
국적 한국

요약 한국문단에 해외문학이론을 소개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을 나타낸 평론을 발표했다. 특히 〈조선에 있어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에서 조선의 폐쇄된 문학풍토를 비판하고 조선문학이 더욱 발전하려면 외국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진영의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한국문단에 해외문학이론을 소개하고 민족주의적 입장을 나타낸 평론을 발표했다. 호는 소천·이구(李求)·지산.

1916년 광진보통학교를 마치고 1920년 독학으로 중동학교에 입학, 그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1925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1고등학원 문과대학에 입학해 1931년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했다. 유학하는 동안 김진섭·이하윤·정인섭과 해외문학연구회를 만들었고, 귀국하여 함대훈·이홍종·이동석과 신흥문학연구회를 만들었다.

1931년 경성보육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36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으며, 1931~39년 극예술연구회 연구책임자로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붓을 꺾고 칩거했으며, 8·15해방이 되자 중앙문화협회 창립회원,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창립회원,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창립회원, 〈민주일보〉 편집국장, 〈민중일보〉 부사장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1949년 공보처 차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1970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동대학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했다.

1931년 〈신생〉에 시 〈제야〉·〈회상곡〉·〈세기아의 영탄〉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나 1931년 〈동아일보〉에 대학졸업논문인 〈사회학적 예술비평의 발전〉을 발표한 뒤로는 평론을 주로 썼다. 이듬해 발표한 〈조선에 있어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에서 조선의 폐쇄된 문학풍토를 비판하고 조선문학이 더욱 발전하려면 외국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진영의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특히 대표적 평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문학은 어디로〉(동아일보, 1934. 1. 1~12)에서 "문학인은 나날이 없어지려는 우리말을 중요시해야 하고 체험을 바탕으로 고민과 불안을 반영하는 문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불문단 사조의 동태〉(조선일보, 1935. 1. 1~4)·〈대전과 불란서 문학〉(조광, 1939. 11) 등 외국문학이론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행동정신의 탐조〉(조선일보, 1935. 4. 12~19)에서는 문명을 지키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행동주의 문학이론을 소개했다. 평론집으로 〈문화와 자유〉(1952)·〈모색의 도전〉(196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