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1세

니콜라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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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6. 7. 6(구력 6. 2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차르스코예셀로
사망 1855. 3. 2(구력 2. 18),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황제(1825~55 재위).
(영). Nicholas I. 정식 이름은 Nikolay Pavlovich.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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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어린시절
  3. 교육
  4. 황제즉위
  5. 성격
  6. 이데올로기
  7. 통치
  8. 치세말기
니콜라이1세(Nikolay I)
니콜라이1세(Nikolay I)

개요

전형적인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꼽히며 극보수주의 정책으로 30년 동안 러시아를 얼어붙게 만든 황제로 불린다.

어린시절

니콜라이는 대공(大公) 파벨과 대공비 마리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약 100일 후 예카테리나 2세가 죽어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의 황제 파벨 1세로 즉위했다. 니콜라이는 나중에 황제가 된 19세 위인 알렉산드르 1세와 17세 위인 콘스탄틴 등 2명의 형이 있었고 2년 어린 동생 미하일과 여동생 안나는 어릴 적부터 사귀어 평생 친구로 지냈다.

파벨 황제는 매우 신경질적이며 오만하고 독재자의 기질이 있었지만 어린 자녀들에게는 다정하고 자상하게 대했으며, 사랑하고 귀여워했다.

니콜라이가 5세가 채 되기 전인 1801년 파벨이 궁전 쿠데타로 살해되자 알렉산드르가 황제로 즉위했다. 어머니 마리야는 성격 그대로 아이들과 냉정하고 딱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여러 모로 전통적 덕목이나 온후함이 결여되어 있으면서도 엄격함이 곁들어 있는 성격이었다. 믿을 만한 측근의 말을 빌리면, "이 비범한 여인의 유일한 단점은 자기 아이들과 아랫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는 것이다."

교육

미래의 황제 니콜라이의 첫번째 선생은 스코틀랜드인 유모 제인 라이언이었다.

그녀는 예카테리나 2세의 임명을 받아 니콜라이가 7세 때까지 함께 지냈다. 어린 대공은 라이언에게서 러시아 자모(字母)와 러시아 기도문, 폴란드인에 대한 증오심까지도 배웠다(그가 폴란드인을 심하게 미워하는 까닭은 1794년 폴란드 국민투쟁의 격동기 때 바르샤바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유모의 이야기를 듣고 부터라고 설명했음).

1802~03년에는 남자들이 그를 돌보면서 정규교육을 시작했다.

마트베이 람스도르프 장군의 지시에 따른 엄격한 규율과 격식을 강조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는 러시아어·프랑스어·독일어를 비롯해 러시아 역사와 지리, 세계사와 프랑스 지리를 익혔다. 다음에는 종교·그림·산술·기하·대수·물리 등이 교과과정으로 덧붙여졌다. 또한 춤·음악·노래·승마를 배웠으며 어릴 적부터 연극·가장무도회를 비롯한 궁정 오락에 접했다. 1809년부터는 정치경제·논리학·윤리학·자연법에서 전략에 이르는 상급교과과정에다 영어·라틴어·그리스어도 어학교육에 추가되었다.

니콜라이는 러시아 군주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지만 그가 여기서 얻은 것은 별로 없었으며, 엄격하고 따분하다고만 생각했다. 오직 군사학만을 좋아하여 훌륭한 공병대원(工兵隊員)이 되었으며 일부 군사지식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었다. 더욱이 마음으로는 언제나 헌신적인 청년장교였다. 주변상황도 그에게 군국주의를 키워주기에 알맞았다. 니콜라이와 남동생의 교육은 1812~15년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다가 끝나버렸다.

1814년 군입대가 허용된 그들은 실제로 전투를 보지는 못했지만 성급한 열정의 시기를 살았으며 파리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 여러 도시에 머무를 기회도 가졌다.

1815년 11월 4일 베를린의 공식만찬에서 알렉산드르 1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니콜라이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러시아정교회 교도가 된 뒤에는 알렉산드라로 이름을 바꿈)의 약혼을 발표했다. 약 20개월 후인 1817년 7월 13일 엄숙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 결혼은 나폴레옹에 대항했던 그 중대한 시기와 나폴레옹 전쟁 후 평화협정을 맺은 빈 회의에서도 입장을 같이 한 두 통치 가문이 맺은 정치적·왕조적 합의였기 때문에 유례없는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니콜라이는 아내를 사랑했고 장인과 처남들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한 처남은 후에 프리드리히 4세가 되어 그의 동반 통치자가 되었다. 더욱이 그는 프로이센 궁정, 특히 프로이센 군대에 깊이 매료되었다. 처가 식구들과 처가의 나라에서 즐거움과 편안함을 느꼈으며, 몇 년 동안은 가능한 한 자주 방문하려고 애썼다.

훈련을 마무리짓기 위해 니콜라이 대공은 1816년 5월에서 9월까지 러시아 각지를 두루 여행하고 1816년말부터 1817년초까지 6개월 간의 영국 여행 등 2차례에 걸친 연수여행을 다녀왔다.

짧은 시간 안에 드넓은 지역을 돌아본 러시아 여행은 겉핥기식이었으나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내용은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관찰은 원인보다는 현상을 다루고 있으며, 폴란드인과 유대인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비롯해 많은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행에서 받은 인상은 황제가 된 후에도 그를 사로잡다시피한 집념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20여 지역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주로 런던에 머물렀다.

영국의회 개원 때 참관하는 동안 영국 정치 전반에 걸쳐 약간의 지식을 얻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 그가 기록한 유일한 논평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미래의 황제는 육군·해군 중심지들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더 성미에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좋아했던 영국인 친구는 웰링턴 공작이었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 그는 육군 공병단의 감찰총감에 임명되었다. 그후 몇 년 동안 여러 군사직책을 거쳤으나 그렇게 중요한 자리는 아니었다.

황제즉위

1825년 12월 1일 러시아 남부에서 알렉산드르 1세가 갑자기 죽자 황실은 위기에 봉착했다.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직계 남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콘스탄틴이 즉위 서열 1위였지만 콘스탄틴은 이미 1820년 왕족이 아닌 폴란드 여성과 결혼하여 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였다. 따라서 니콜라이가 러시아의 다음 통치자로 내정되어 있었고, 이는 1822년 알렉산드르 1세가 서명한 성명서에 명시되어 있었으나 공표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니콜라이는 이 모든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고 국민의 반응을 알아보기로 했다.

국민은 콘스탄틴이 알렉산드르의 뒤를 잇기를 원했다. 그러나 콘스탄틴과 그가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폴란드 왕국은 니콜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니콜라이와 러시아의 수도 그리고 러시아군은 콘스탄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 벌어졌다.

콘스탄틴이 끝내 입장을 굽히지 않자 시간이 흐른 뒤 니콜라이는 알렉산드르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러시아의 황제가 되기로 결정했다. 1825년 12월 26일(구력 12. 14)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근위연대가 이번에는 니콜라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된 날이었으나, 자유주의 음모자들이 이른바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일으켰다.

대부분이 장교인 이들은 군 내의 영향력을 이용해 몇몇 부대에서 반란을 주도하고 황제자리를 빼앗은 동생에 대항해 콘스탄틴의 정당한 이익을 지킬 것을 호소했다. 모두 3,000여 명의 반란군이 대열을 갖추고 수도 심장부인 원로원 광장(지금의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행군해나갔다. 밤이 되어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이것은 니콜라이 1세가 무시무시한 혁명군과의 싸움을 통해 자기 부하들의 주검을 딛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뜻했다.

성격

니콜라이 1세는 행동과 정책뿐만 아니라 외모나 태도에서도 전형적인 전제군주라는 역사적인 평을 받았다.

미국의 외교관 앤드루 딕슨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0cm를 넘는 키와 항상 치켜든 머리, 약간 매부리코에 가벼운 콧수염, 그 아래 완고하게 잘생긴 입, 각진 턱과 위압적이며 오만하게 생긴 얼굴, 부드럽다기보다는 고압적이고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위풍당당한 그는 아폴로와 주피터를 닮은 데가 있었다…… 니콜라이가 유럽에서 가장 미남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니콜라이 1세 때 러시아를 비난함으로써 영원한 문학적 명성을 얻은 쿠스틴 후작 아돌프는 "베르길리우스의 넵투누스…… 누구도 그보다 황제다울 수는 없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니콜라이 1세는 위엄있고 단호하고 강력하며, 돌처럼 단단하고 운명처럼 잔인한 사람으로서 전제정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니콜라이가 애써 자주 과시하려 했던 전제군주로서의 초연함과 오만하면서도 냉정함은 근본적으로는 위장된 겉모습이었다.

그가 엄격하고 가차없는 행동을 고집한 것은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공포심 때문이었다. 단호함은 공포에 가까운 상황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용기는 절망 비슷한 감정에서 나왔다. 그는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리프와 같은 한 개인, 데카브리스트 같은 단체, 폴란드인 같은 민족, 혁명 같은 개념에도 똑같이 격한 증오심을 가졌고 항상 분노의 대상이 파멸할 때까지 계속 공격하려는 충동을 받았다.

그러나 황제는 공격적 태도만으로 삶의 문제를 처리하려 들지는 않았다.

조직화·질서·정돈·정확성을 추구했고, 상당한 노력을 통하여 항상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려 했다. 그는 선천적인 훈련의 명수이자 감찰관이었다.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마음이 사로잡혔다고 할 만큼 군대를 사랑했다. 그밖의 모든 분야에서도 역시 꼼꼼하고 정확한 규칙을 내세워 빈틈이 없었다. 그의 지위·환경·성격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졌지만 그 짐을 30년이나 견디어냈으며, 탁월한 소명감과 헌신적인 노력, 진지한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힘을 빌려 버텨나갔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앞날은 더욱 비관적이고 운명적인 것이었으며, 크림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 독재자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선언했다. "내 힘이 다할 때까지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데올로기

니콜라이의 견해는 그의 성격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반(反)나폴레옹 전쟁과 반동의 시대에서 자라났고 진심으로 반동보수주의를 자신의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유럽 반동보수주의를 대표하게 된 니콜라이와 그의 정부는 '관제국민성'이라는 정책으로 그 이데올로기를 표명했다.

1833년 교육장관 세르게이 우바로프 백작이 정식으로 선포한 관제국민성은 정교신앙(正敎信仰)·전제주의·국민성이라는 3가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제주의는 러시아에 없어서는 안 될 기반으로 여겨지는 군주의 절대권력 인정과 유지를 의미했으며, 외교면에서는 정통주의와 빈 협정의 수호라는 형태로 변형되었다(절대주의). 정교신앙이란 러시아의 공식 교회와 그 중요한 역할을 일컬었고, 동시에 인간의 삶과 사회에 의미를 주는 윤리와 이념의 궁극적인 원천을 말한다.

국민성이란 러시아 국민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 왕조와 정부를 강력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떠받쳐주는 힘이라고 여겼다. 알렉산드르 1세가 변화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데 비해 니콜라이 1세는 조국의 기존질서, 특히 전제정치를 수호하려고 단호히 결심했다.

통치

니콜라이 1세의 통치는 그의 성격과 원칙을 뚜렷이 반영했다.

새 정치체제는 두드러지게 군국주의적·관료주의적이었다. 황제의 주변은 군인들로 둘러싸였으며 심지어 통치 말기에는 직속 보좌관 가운데 민간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대부분 장군들로 이루어진 특사(特使)들에 크게 의존했는데, 군주의 의지를 즉각 집행한다는 특별임무를 띠고 그들은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되었다. 정규행정체계와는 별도로 움직이는 이들은 바로 군주 자신을 대표했다. 공식보고와 관례에 관한 한 모든 정부기구는 직접명령·절대복종·정확성에 따라 군대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규율과 원활한 기능이라는 이 겉치레 뒤에는 부패와 혼돈이 자리잡고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국가업무를 수행할 때 종종 정규 경로를 무시했으며, 대체로 정식 심의와 협의, 절차상의 업무지체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장관회의·국무협의회·원로원은 그 중요성이 축소되었다. 이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은 황제는 직접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그의 의도를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만든 특수관료기구에 더 의존했다.

그가 즐겨 쓴 방법은 정해진 국가기구가 아닌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폭넓게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들은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몇 명의 보좌관으로 구성되었는데, 몇 명뿐이었기 때문에 같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묶여 니콜라이의 통치기간 동안 여러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미 난처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제국의 행정은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어떤 위원회가 임무수행에 실패하면 또다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한 예로 니콜라이 재위기간에 약 9개의 위원회가 농노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전제주의 성향은 '황제원'의 발전과 새 역할에서도 나타났다. 황제원은 원래 황제가 직접 개입해야 하는 문제를 처리하고 황제의 명령집행을 감독하기 위해 조직된 국(局)으로서 그뒤로 5개의 새 부서가 그 안에 생겼다.

즉 1826년에는 법전편찬을 맡을 제2부와 새로 만든 경찰부대를 맡을 제3부가 생겼다. 1828년에는 황태후 마리야가 관할하는 자선교육기관을 관리하기 위해 제4부가 생겼고 1836년에는 국가 농노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제5부(곧 내각의 새 국유지 관리부로 대치)가 만들어졌다. 1843년에는 자카프카지예에 관한 행정계획을 짜기 위해 제6부가 생겼다.

황제원의 각 부서는 정규 국가경로를 회피한 니콜라이의 개인정책을 수행하는 주요수단이었다.

제3부인 정치경찰은 정부전복과 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독재자의 주무기로서, 신하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상벌을 주는 주요기구로 기능했다. 제3부의 활동영역은 '고등경찰의 모든 명령과 보고'에서부터 '모든 사건에 관한 빠짐 없는 보고'에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차례로 제3부를 맡았던 알렉산드르 벤켄도르프 백작과 알렉세이 오를로프 공작은 다른 보좌관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황제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한 예로 그들은 니콜라이의 여러 차례에 걸친 러시아 전국 시찰 때도 그를 수행했다.

재위기간 내내 니콜라이 황제는 전제정치의 원칙을 지켜 국민들의 일상생활·희망·두려움에 관심을 갖는 참된 국부(國父)가 되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는 사소한 것 말고는 국민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농노제 폐지를 두려워했고 모든 독립적 발안과 대중의 참여에 의혹을 품어 전제정치 유지를 결심한 니콜라이와 그의 정부는 절실하게 필요한 근본적 개혁을 도입할 수 없었다. 이론상으로나 실제에서도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다.

중요한 발전은 러시아 제국의 기본구조를 위협하지 않는 몇몇 분야에서만 이루어졌다. 미하일 스페란스키 백작은 법전을 편찬했고 파벨 키셀료프 백작은 국가 농노들의 처지를 바꾸고 향상시켰다. 그러나 1848년부터는 제한된 개혁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치세말기

유럽 혁명에 크게 위협을 느낀 니콜라이 1세는 완전히 반동적으로 변했다.

한때 성공을 거두었던 외교정책은 집권 말기에 가서는 실패하여 러시아의 고립과 크림 전쟁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 두려움을 모르는 정통주의 수호자로서 1848~49년 혁명 후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사실상 주도권을 장악했던 그였으나 그 자신의 계산착오·엄격함·퉁명스러움 때문에 프랑스·영국·사르데냐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과 외로이 싸워야만 했다.

그는 몇몇 역사가들의 주장대로 자살한 것 같지는 않지만, 지치고 시달린 러시아 황제에게 죽음은 곧 해방을 의미했다.

1855년 2월말에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었고, 한때 건강했으나 이제는 확실히 지쳐버린 몸으로 폐렴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맑은 정신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후계자와 가족들에게 "이제 나는 러시아와 그대들을 위해 기도하러 하늘나라로 간다. 러시아 다음으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그대들을 사랑했다. 러시아를 위해 일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남은 가족으로는 아내 알렉산드라 황후와 다음 황제 알렉산드르 2세, 대공 콘스탄틴·니콜라이·미하일과 공주 마리야·올가 등 6명의 자녀가 있었고, 또 알렉산드라라는 딸은 1844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