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파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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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4. 10. 1(구력 9. 20),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801. 3. 24(구력 3. 12),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황제(1796~1801 재위).
(영). Paul. 정식 이름은 Pavel Petrovich.

표트르 3세(1762 재위)와 예카테리나 여제(1762~96 재위)의 아들로 아버지의 숙모인 옐리자베타 여제(1741~61 재위)의 손에 자랐다. 1760년 이후로는 어머니의 가까운 조언자이던 학식 있는 외교관 니키타 이바노비치 파닌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와는 결코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1762년 남편과 아들을 제치고 황제위를 빼앗았으며, 그뒤에도 줄곧 아들이 정부 업무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파벨은 첫번째 아내인 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러시아 이름은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가 죽고 얼마 안 되어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결혼한 뒤 어머니에 의해 가트치나의 영지에서 살게 되었다(1783). 이곳에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중앙정부에서 떨어져 자신의 작은 궁정을 갖고 영지를 관리하며 사병을 훈련시키고 정부개혁을 계획하는 일에 몰두했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의 아들 알렉산드르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그녀가 죽자 파벨이 황제가 되었다(1796. 11. 17[구력 11. 6]). 그는 황제가 후계자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고 정한 표트르 대제의 법령을 즉시 폐지하고 대신 로마노프가의 부계계승을 확고한 원칙으로 확립했다(구력 1797. 4. 5). 또한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여제가 세운 정책 가운데 많은 것을 바꾸었다. 여제가 1775년에 폐지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관을 복원했으며, 지방정부에 대한 관료적 통제를 강화하고 귀족 권력을 제한하려 하여 귀족들에게 반감을 샀다.

군대에 엄격한 징계제도를 도입하고 가트치나 부대를 눈에 띄게 편애하여 명망 있는 군위대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지지세력들 사이에서도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농민층에 대해 일관성 없는 정책을 취했으며 평화적인 대외정책(1796)에서 제2차 대 프랑스 동맹(1798) 참여로, 그리고 반영국 정책(1800)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1800년말에 이르러 러시아는 프랑스와는 공식적인 전쟁상태였고 영국과는 비공식적인 전쟁상태였으며, 오스트리아와는 외교관계도 없고, 중앙 아시아의 이름 없는 칸국[汗國]들을 통해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 직전의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그의 일관성 없는 정책과 폭군적이고 변덕스러운 정책수행 방식으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사 표트르 폰 팔렌 백작과 폰 베니히센 백작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장군이 이끄는 일단의 민간·군사 관료들이 파벨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의 동의를 구하고 황제를 폐위시키기로 했다. 1801년 3월 23일(구력 3. 11) 그들은 미하일로프스키 궁에 침입하여 침실에 있던 파벨을 암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