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정복

노르만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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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앵글로색슨계의 마지막 왕 에드워드는 1051년 윌리엄을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웨식스 백작 해럴드가 왕위에 오르자 유럽 대륙의 여러 정치 세력들의 지지를 받은 윌리엄이 왕위를 얻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였다.
1066년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주요 지도자들의 항복을 받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라 곳곳의 반란을 진압하고 잉글랜드를 완전히 정복했다.
윌리엄이 승리한 결과 잉글랜드는 스칸디나비아와 유대를 끊는 대신 서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군대식 봉건제가 도입되었다.
정복 후 공식문서와 그 밖의 기록은 라틴어로 쓰였다가 점차 모든 분야에서 노르만프랑스어로 다시 바뀌었기 때문에 노르만 정복부터 13세기까지 영어로 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이겨(1066. 10. 14) 정복에 성공했으며 브리튼 제도의 정치·행정·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구(舊)잉글랜드 왕족인 앵글로색슨계의 마지막 왕 에드워드는 1051년 윌리엄을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가 죽은 후 강력한 웨식스 백작 해럴드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왕위는 결코 안전하지 못했다.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윌리엄을 지지했으며 윌리엄은 해럴드와 싸우기 위해 8월에 기사 5,000여 명을 모았다. 해럴드는 여름 내내 군대에 경계근무를 시켰지만 9월초 보급품이 떨어지자 군대를 해산시켰고 그후 서둘러 요크셔 지방으로 가 스탬퍼드브리지에서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의 침략을 격퇴했다(9. 25).

윌리엄의 수송선은 북풍 때문에 8주 동안 항구에 묶여 있었으나 9월 27일 바람이 방향을 바꾸자 즉시 영국해협을 건너 이튿날 페번지 만(灣)에 상륙해 곧바로 헤이스팅스로 진격했다.

남쪽으로 행군을 강행하던 헤럴드는 10월 13일 병사 7,000여 명을 이끌고 헤이스팅스에 도착했는데,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훈련도 받지 못한 병사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무리하게 전투 준비를 하다가 10월 14일 새벽 윌리엄에게 기습당해 헤이스팅스에서 북서쪽으로 16㎞ 떨어진 능선까지 후퇴했다. 윌리엄은 하루 종일 기병대를 돌격시키면서 틈틈이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잉글랜드군은 점차 싸울 힘을 잃었으며 오후 늦게 해럴드는 화살에 맞아 죽었고, 해질 무렵에는 남아 있던 잉글랜드군도 흩어져 도망쳤다.

윌리엄은 런던을 고립시키려고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며 버컴스테드에서 잉글랜드의 주요 지도자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는 1066년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1071년까지 곳곳에서 토착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극심했던 노섬브리아 반란(1069~70)은 윌리엄이 직접 진압했으며, 뒤이어 군사를 몰아 드넓은 북부지역을 제압했다.

그리고 곳곳에 많은 성채를 지어 잉글랜드를 완전히 정복했다.

역사가들은 노르만 정복 때문에 일어난 변화의 정도와 성격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정치적으로 보면 윌리엄이 승리한 결과 잉글랜드는 스칸디나비아와 유대를 끊는 대신 서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편 잉글랜드 내부에서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군대식 봉건제 도입이었다.

노르만 정복 이전에도 봉사(奉仕)의 대가로 토지를 소유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윌리엄은 4,000명이 넘는 기사를 봉건영주로 승격시켜 상류계급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왕은 기사 봉사에 대한 대가로 노르만인 180여 명에게 대부분 토지를 내렸고, 이들은 자신의 봉신들에게 영지를 재분봉했다. 고위 성직자나 행정관리 인사에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노르만 귀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앵글로색슨족은 잉글랜드 중앙·지방 행정을 고도로 조직화했고 사법제도도 효율적으로 운영해왔으므로 윌리엄은 이런 제도들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대관식 선서 때 잉글랜드 왕가의 전통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윌리엄은 옛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했고, 주(州)·헌드레드(주보다 작은 지역단위) 법정의 관례적인 사법권을 침해하지 않았으며, 이들 재판소와 국왕법정에서는 계속해서 보통법(common law)에 따라 법을 집행했다. 삼림법(森林法)을 제한적이나마 새로 채택했고,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옛 색슨족의 신판(神判 ordeal)과 함께 결투로 판결을 하는 노르만식 재판을 도입했으며 행정과 사법 문제를 다룰 때에는 이웃이 선서증언을 하는 심문방식을 많이 썼다.

주요변화는 세속법정에서 교회사건을 다루지 못하게 한 것인데, 이를 계기로 당시 급속히 확산되어가던 교회법이 영국에 들어왔다.

구잉글랜드 귀족이 힘을 잃었다는 것 외에 노르만 정복 때문에 생긴 가장 애석한 결과는 문학·법률·행정 용어에서 잉글랜드 고유언어가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정복 후 공식문서와 그밖의 기록은 라틴어로 쓰였다가 점차 모든 분야에서 노르만프랑스어로 다시 바뀌었기 때문에 노르만 정복부터 13세기까지 영어로 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