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네팔

다른 표기 언어 Nepal 동의어 네팔연방민주공화국, Kingdom of Nepal, Nepal Adhirajya
요약 테이블
위치 아시아 히말라야 산맥 중앙
인구 30,985,372명 (2024년 추계)
수도 카트만두
면적 147,181.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네팔 연방 민주 공화국 (The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Nepal)
기후 아열대성기후
민족 구성 체트리족(16%), 브라만힐족(13%), 마가루족
언어 네팔어
정부/의회형태 내각책임제(총리가 행정수반)
종교 힌두교(81%), 불교(11%), 이슬람교
화폐 네팔 루피 (Rp)
국화 붉은만병초
대륙 아시아
국가번호 977
GDP USD 27,278,000,000
인구밀도 216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np

요약 북쪽으로는 중국의 시짱 자치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 정상이 공동 국경으로 되어 있고, 동쪽·남쪽·서쪽 경계는 인도 국경과 접해 있는 내륙 국가. 1950년까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50년 왕권 회복을 위한 혁명이 일어나 51년 왕정복고에 성공했다. 91년 네팔 왕조는 다당제 의회 제도를 수립했다. 하지만 강력한 마오쩌둥주의 반군세력과의 10년에 걸친 교섭 끝에, 2008년 왕정이 종식되고 민주공화국을 선언했다. 면적 147,181.0㎢, 인구 30,985,372(2024 추계).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네팔 국민
  3. 경제
  4. 정치·사회
  5. 문화
  6. 역사
  7. 네팔과 한국과의 관계
    1. 외교
    2. 경제·통상·주요 협정
    3. 문화교류·교민 현황
네팔(Nepal)의 국기
네팔(Nepal)의 국기

북쪽으로는 중국의 시짱 자치구[西藏自治區]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 정상이 공동 국경으로 되어 있다. 동쪽·남쪽·서쪽 경계는 인도 국경과 접해 있다. 수도는 카트만두이다.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 800km,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140∼240km로 뻗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험한 산악 지대가 몇 군데 있다. 오랜 동안 지형조건에서 빚어진 고립성과 스스로 초래한 폐쇄성이 지속되어 세계에서 가장 개발이 안된 나라로 손꼽힌다.

지도
네팔

자연환경

네팔의 지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4개의 지대로 나누어진다. 인도 국경을 따라 펼쳐져 있는 타라이 평원, 산림으로 덮인 추리아 산기슭과 북쪽의 내(內)타라이 지대, 산간지역, 대(大)히말라야 산맥이 여기에 속한다. 타라이 평원은 고도가 낮고(해발 180∼360m), 평평하고 기름진 곳으로 너비 26∼32km 가량 되는 갠지스 평원 북쪽과 연결되어 있다.

남쪽은 농업지역인데 산과 만나는 지점은 숲이 우거진 습지이다. 추리아 구릉과 내(內)타라이 지대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으며 험준한 마하바라트 산맥을 중심으로 해발고도가 600∼9,100m까지 이른다. 산간 분지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마하바라트 산맥과 대히말라야 산맥의 사이에 있는 산간지역은 해발 2,400∼4,300m에 이르는 산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다. 바하마티 강이 흘러드는 카트만두 강과 세타 강이 흘러드는 포카라 강 유역의 평평한 지대는 이들 산계에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카트만두 강 유역은 네팔의 정치·문화 중심지이다. 해발고도 4,300∼8,800m인 대히말라야 산지에는 8,040m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에베레스트, 칸첸중가 1봉, 마칼루 1봉, 초오요, 다울라기리 1봉, 마나슬루 1봉, 안나푸르나 1봉)이 있으며 에베레스트 산(8,848m)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코시 강, 나라야니(간다크) 강, 카르날리 강이 히말라야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흐른다. 이 강들은 네팔의 주요 강으로 발전량이 높다.

네팔의 기후는 타라이 지역의 아열대 몬순기후에서부터 대히말라야 산맥의 고산기후까지 여러 층이다. 연강수량은 타라이 동쪽이 1,800∼1,900㎜, 네팔 서부가 760∼890㎜이다. 몬순계절(7∼10월 중순) 동안 타라이 평원의 낮은 지대에서는 홍수가 심각한 문제이다.

겨울(11∼3월) 평균기온은 타라이 지역 남쪽이 19℃, 산간분지는 13℃이며 여름(4∼6월) 평균기온은 각각 28℃와 21℃이다.

네팔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 가운데 하나는 국토의 약 1/6을 덮고 있는 넓은 숲으로 목재와 땔감, 의약용 약초를 제공해 준다. 가장 고도가 낮은 지역은 습기가 많은 열대성 기후의 영향으로 낙엽수림이 우거져 호랑이·표범·사슴·원숭이와 얼마 되지 않는 인도 코뿔소의 은신처가 되고 있다. 해발고도가 1,200m 이상 되는 지대에는 상록수와 낙엽수(참나무·단풍나무·목련)가 자라며 히말라야 산맥 중앙 비탈면에서는 표범과 곰 종류도 가끔 나타난다.

3,050∼3,650m 되는 곳은 침엽수림 지대로 토끼·사슴·영양 등과 작은 육식동물들이 산다. 진달래속 식물이나 향나무 따위가 자라고 여기보다 고도가 높은 아(亞)고산 및 고산초원지대에는 사향노루와 야생양이 서식한다.

네팔 국민

초기 정착은 티베트에 살고 있던 몽골계와 인도 북쪽의 인도아리아계 종족이 대규모로 옮겨오면서 이루어졌다. 인도아리아족 혈통을 이어받은 주민이 전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요 소수민족은 티베트계 네팔인이다. 산스크리트에서 갈라져 나온 네팔어가 공식 언어이고 티베트미얀마어족에 속하는 네와리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들도 많이 쓴다.

인구의 9/10 가량이 힌두교도이며 불교를 믿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비교적 높지만 네팔의 인구는 꽤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인구의 2/5가 15세 미만이다. 국민들 대부분이 시골 지역에 살며 도시 인구는 거의 카트만두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는 교통과 통신 서비스 개선, 지역개발 사업을 통해 타라이 지역의 높은 인구밀도를 줄이는 한편 농촌에 소규모 산업시설을 세워 새로운 도시구역으로 발전시키려 애쓰고 있다.

경제

네팔은 대체로 농업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체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중국·인도·독일·미국·캐나다·스위스 및 국제기구의 원조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는 것만큼 빨리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농업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이 넘으며 노동력의 9/1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체 토지 면적 가운데 경작이 가능한 땅은 1/5 정도를 넘지 않으며 농업 생산성이 아주 낮다. 카트만두 남동쪽에 발전소가 세워지면서 관개가 가능한 땅이 약 5% 늘어났다.

네팔은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로 농사를 짓지만 식량 공급과 수요의 혼란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는 지역도 있다.

주요산물은 쌀이며 옥수수·밀·감자·사탕수수·기장도 많이 재배한다. 히말라야 산맥 비탈면에서 자라는 의약용 약초가 주요 생산품목으로 손꼽히며 소·물소·염소·양 같은 가축류도 기르고 있다.

주요산업은 임업이다. 통나무 원목 벌채가 주종을 이루는데, 이들 원목은 거의 연료로 쓰여 네팔에서 소비되는 에너지 대부분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나무를 연료로 쓴 결과, 숲이 파괴되면서 심각한 침식현상이 일어났다.

거의 개발되지 않은 상태의 석탄(갈탄)·구리·마그네사이트·코발트·철광상이 매장되어 있다. 카트만두 가까운 곳에서는 운모가 채굴된다. 광업 부문은 GNP의 4%, 전노동력의 1%미만을 차지하는 정도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부문에서 국내 원자재 사용을 늘리려는 노력이 정부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제조업은 면의류·벽돌·타일·제지·건설자재·가공식품 산업이며 바구니·식용유·면직물 같은 전통제품은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고 있다.

건설은 GNP에서 6% 정도를 차지하며 금융을 포함한 서비스업은 GNP의 1/5을 차지한다.

주요 외화획득원으로서 관광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외국 관광객들에게 필요한 편의시설을 갖춘 지역은 카트만두 강 유역뿐이다. 1978년 네팔 정부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을 그리스도교의 예루살렘, 이슬람교의 메카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불교 성지순례지로 조성하려는 야심찬 7개년 개발계획을 세웠지만 빈약한 기반시설과 재정 사정 때문에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전력은 거의 수력발전을 통해 공급된다.

1인당 전기 소비량은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많이 낮은 편이며 전력 공급은 도시지역에서도 상당히 제한되고 있다.

재정지출(개발을 위한 지출도 포함)은 정기 세입을 훨씬 넘어선다. 세입은 거의 관세, 내국소비세, 사업체와 개인들이 내는 세금에서 나온다. 재정수입과 지출에서 생기는 차액은 주로 외부 원조를 통해 보충된다.

정기예산은 대체로 대부상환·국방·일반행정·경제활동·사회복지사업·교육에 할당된다. 외국에서 받는 원조의 대부분은 정부의 5개년 개발 계획에 쓰인다.

네팔의 해외무역은 인도가 관할하며 네팔은 제한된 운송권만을 갖고 있다. 네팔의 주요수출품은 면의류·곡물·황마·목재·유료종자·기(ghee:정제 버터)·감자와 의료용 약초 및 짐승가죽이다. 자본과 소비재 상품, 광물 연료, 화학 제품은 거의 수입에 의존한다.

정치·사회

2008년 5월 28일 네팔 연방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민주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를 말한다. 2006년까지 네팔의 공식 명칭은 네팔 왕국이었으며 민주적 입헌군주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네팔 왕조는 1768년 12월 21일 수립되었다. 1990년 11월 새 헌법이 선포된 후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며 국왕의 권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입헌군주제에서도 국왕은 국가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가지지만, 실질적인 행정권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 있으며 국왕은 자신의 고유 권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각료회의의 권고와 동의에 따라야 한다.

2007년 12월 국민투표에 따라 군주제 폐지가 결정되었다. 2008년 5월 처음으로 진행된 네팔 제헌의회 회의에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는 결의안이 압도적 지지로 채택되었다. 같은 해 6월 네팔의 마지막 국왕인 갸넨드라(Gyanendra Bir Bikram Shah Dev)가 가족과 함께 궁을 떠났으며 이후 궁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팔 연방민주공화국의 정치 형태는 내각책임제로 총리가 행정 수반을 맡는다. 의회는 상원(National Council) 59석,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 275석의 양원제(총 334석)로 구성된다. 민주공화국 도입을 결정한 제헌의회는 601석(단원제)이며 2017년 10월 잔여 임기 종료 시까지 의원직을 유지한다. 2015년 10월 28일 비디아 데비 반다리(Bidya Devi Bhandari)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총리는 푸슈파 카말 다할(Pushpa Kamal Dahal)로 2016년 8월 4일 취임하였다.

생활수준이 낮고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으며 평균수명은 57세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의 1/3과 여자의 1/10 정도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그러나 공립학교가 많이 세워져 교육 기회가 늘면서 문자 해득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5년간의 의무교육(1975 이후로 무료)과 고등교육이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기본 생필품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마을 개발계획 같은 사회복지제도가 행해지고 있다. 의료시설이 부족해서 농촌지역의 주민들 대부분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의료요원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병원이 환자로 초만원을 이루고 위생상태도 좋지 않다. 풍토병인 위장염을 비롯해 간장염, 콜레라, 결핵, 장티푸스가 널리 퍼져 있다. 1인당 음식 공급량이 비교적 낮아 영양결핍에서 비롯되는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다. 집은 보통 갈대나 슬레이트 지붕에 진흙, 욋가지, 대나무를 비롯한 나무와 돌로 짓는다.

고등교육은 비교적 최근 들어 발전하고 있다. 1918년에 세워진 네팔 최초의 대학인 카트만두의 트리부반대학교는 1959년에 정식 대학 인가를 받았다. 법률적으로 고등교육을 책임지는 유일한 기관은 세닛대학교인데, 주로 교육부 기금으로 운영된다. 신문·정기간행물은 네팔어와 영어로 간행되고 있다. 신문은 곧잘 선정적이며 인력·재정 면에서 취약하다. 가장 유력한 신문은 정부 기관지 〈고르카 파트라 Gorkha Patra〉이다.

국내외 심층 기사를 접하려는 독자들은 외국 언론, 특히 매일 카트만두로 공수되는 인도 신문들을 많이 본다. 1960년 마헨드라 왕(1955∼72 재위)이 언론의 정치활동을 보도에 대해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강제한 이후 검열이 강화되었고, 1985년에는 많은 신문이 정간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1990년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의 언론의 자유가 회복되었다. 관영 네팔라디오방송이 네팔어와 영어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으며, 카트만두에 있는 네팔 역사상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1986년에 첫 방송을 시작했다.

문화

1951년 라나 체제가 무너진 후 검열이 완화되자 예술적·지적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네팔어로 쓴 문학 작품들은 문예부흥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이었던 마헨드라 왕은 문학·예술의 부흥을 위해 힘썼는데, 네팔어로 쓴 그의 서정시는 그의 이름 첫머리를 딴 'M. B. B. 샤'라는 필명으로 영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네팔의 문화유산, 특히 카트만두 계곡의 네와르족의 조각과 회화, 건축물은 네팔의 큰 자랑거리이다.

네와르족 장인들의 예술혼의 바탕에는 힌두교·불교의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종교가 전통적 주제이다. 이들의 조각·건축·연극에는 신과 성인·영웅들의 생애, 인간과 사회·우주와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카트만두 계곡에 있는 약 2,500개의 사원·신전들은 네와르족 장인들의 빼어난 솜씨와 미적 감각을 잘 보여 준다.

네팔인들이 가장 즐기는 소일거리는 음악과 춤이다. 종교의식을 거행할 때 먼 옛날부터 사용해 온 북과 관악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거의 모든 종교 행사와 가족 행사에서 중요한 요소는 찬가인데, 찬가가 고전음악과 민속음악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 일부 전통문화 부흥론자들은 찬가를 통해 고전음악과 민속음악의 간극을 메우려고 시도해 왔다.

역사

네팔의 초기 역사는 불교힌두교 색채가 강한 네와르족 전설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대 인도의 고전에도 네팔 골짜기와 낮은 구릉지대에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BC 3세기경 인도를 다스린 제왕 아소카가 네팔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4∼5세기 리츠차비 왕조가 다스리는 동안 고립되어 있던 네팔 골짜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통해 무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지적·문화적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7세기 중엽에는 중국과 접촉하여 사절을 교환했다.

10∼18세기에 네팔은 말라 왕조 지배 아래 있었다. 약사 말라(1429경∼82 재위)는 왕국을 독립된 공국 3개로 나누었으며 이 공국들은 16세기까지 각기 독립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1769년 프리트비 나라얀 샤가 이끄는 구르카인(人)들이 네팔 골짜기를 정복했다. 그는 수도를 카트만두로 옮기고 네팔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1775∼1951년 네팔의 정치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패권을 쥔 귀족가문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왕실은 명목상으로만 지배층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에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자 네팔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1846년 이래 네팔을 지배하고 있던 라나 가문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1860년 네팔은 용맹무쌍한 구르카 부대의 영국령 인도군대 편입 및 네팔 외교권의 이양을 수용하는 대신 국내외 적으로부터의 라나 체제 보호 및 국내 문제에 대한 실질적 자치를 영국으로부터 보장받는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나자 막강한 외세를 상실한 라나 체제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1950년 11월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정치적 훈련을 받은 인도 거주 네팔인들을 중심으로 한 반(反)라나 혁명군이 트리부반 왕(1911∼55 재위)과 동맹을 맺고 라나 체제의 타도를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네팔의회당(Nepali Congress Party/NCP)이 이끄는 혁명군은 인도의 강력한 외교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1년에 라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네팔은 왕정으로 복귀했다.

네팔의 현대사는 민주주의적 전통이나 경험이 없고 오랫동안 전제정치에 물든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왕은 1959년에야 헌법을 승인했고 초대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NCP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NCP를 창설한 국민적 영웅인 B. P. 코이랄라가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코이랄라 총리와 마헨드라 왕 사이에 불화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1960년 12월 마헨드라 왕은 마침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을 불법화하는 한편 NCP의 주요 지도자를 투옥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국왕이 실질적으로 전권을 장악하는 내용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인도와 중국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반대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뿔뿔이 흩어졌다. 1972년 1월 마헨드라 왕이 죽고 그의 아들 비렌드라가 왕위에 올랐다.

비렌드라 왕은 1970년대에 경제개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아버지 머헨드라 왕의 '비(非)정당' 정책을 견지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 정책에서 모두 실패해 1979년에는 체제 위기에 직면했다. 1960년 이후 처음으로 군주제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자, 그는 1980년 5월 비정당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비정당제에 대한 지지율은 55%에 머물렀다. 비렌드라 왕은 의원 직선제를 통한 정치제도의 자유화라는 유화책을 제시하고 NCP를 비롯한 '불법' 정당의 정치활동을 일정 부분 허용했다.

선거는 여전히 비정당 방식으로 실시되었지만 많은 후보들은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NCP와 급진적인 좌파 세력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1990년 2월 NCP와 좌파 연합세력은 근본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가두시위와 파업이 전국적으로 계속 확산되자 정부는 유혈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른바 '1990년 봉기'는 최소한 45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비렌드라 왕을 굴복시켰다.

그해 4월 그는 정당활동 금지조치와 억압적인 포고령들을 해제하고, 크리시나 프라사드 바타라이가 이끄는 NCP와 온건 좌파 성향의 좌익연합전선의 연립 과도내각을 승인했다. 그해 9월 신헌법 초안이 마련되었고 왕의 역할, 정치 발전, 긴급권, 여러 언어의 지위 등의 많은 핵심 문제들을 둘러싸고 2개월 동안 열띤 논쟁이 벌어진 끝에 그해 11월 입헌군주제와 양원제, 복수 정당제를 골자로 하는 신헌법이 비렌드라 왕에 의해 공포되었다.

1991년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NCP가 하원의석 205석 가운데 과반수를 넘는 110석을 차지하고 온건 좌파인 마르크스주의 좌익통일당(United Marxist-Leftist Party/UMLP)이 69석을 차지해 강력한 제1야당으로 부상한 반면, 낡은 체제를 옹호하는 세력은 고작 4석을 얻어 괴멸했다.

새 총리에 오른 NCP의 G. P. 코이랄라는 경제개혁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정책을 둘러싼 당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의회의 불신임으로 1994년 7월에 사임해야 했다.

그해 11월에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NCP는 네팔공산당(United Communist Party of Nepal/UCPN)에게 제1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해 불안하게 출발한 UCPN의 만 모한 아드히카리 총리 내각은 결국 소수 내각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의회의 불신임으로 단명에 물러났다.

이때부터 네팔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다수당의 부재로 단명의 연립내각이 줄을 잇는 극심한 정국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왕정 타도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1996년 초부터 준동하기 시작한 하는 마오쩌둥주의 반군의 존재는 정국의 불안을 한층 부추겼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이어졌다.

네팔의 정치적 불안은 1999년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네팔 국민이 집권 여당인 NCP에 과반수를 넘는 110석을 안겨 줌으로써 일대 전기를 맞았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14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역사적인 '1990년 봉기' 후 과도내각의 총리를 역임한 바 있는 크리시나 프라사드 바타라이가 이끄는 내각이 출범했다. 이는 9년 만에 9번째 들어서는 정부였다.

네팔은 정치불안과 경제난, 힌두교 신자인 대다수 국민이 수용하기 어려운 지역·종족·종교 운동들을 비롯한 숱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대중과 정당들의 압도적 지지로 민주 입헌군주제가 새로 출범했으나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정파들 사이의 대립·갈등을 넘어서지 못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옛 정권들이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외면했던 강력한 경제·사회 정책의 도입이 지체되고 있다.

네팔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네팔은 1969년 한국과 영사협정을 맺었고 1974년에는 한국·북한과 동시에 수교했다. 주네팔 한국 대사관과 주한 네팔 대사관은 각각 1974년, 2007년 설치됐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네팔에는 한국 건설업체들이 진출해 있다. 양국이 맺은 주요 협정으로는 영사협정(1969), 무역협정(1975), 문화협정(1987), 투자보장 및 이중과세방지협정 체결 추진(1996), 경제개발협력기금 기본협정(1997), 항공협정(2001), 항공협정 발효(2005), 고용허가제 양해각서 체결(2007)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에서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 등정을 위해 산악인들이 네팔을 자주 방문하면서 양국의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2023년 기준 한국에는 46,371명의 네팔 국적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 법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