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김종직

다른 표기 언어 金宗直 동의어 효관, 孝盥, 계온, 季昷, 점필재, 佔畢齋
요약 테이블
출생 1431(세종 13), 경남 밀양
사망 1492(성종 23)
국적 조선, 한국
본관 선산(善山)
시호 문충(文忠)
점필재(佔畢齋)

요약 조선 세조 때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계온, 효관, 호는 점필재이며 세종 28년 과거에 응시, <백룡부>를 지어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하였지만 단종 1년 태학에 들어가 <주역>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해 동료들의 경복을 받고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상관에 임명됐으며 이후 두루 벼슬길에 올랐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과 함께 사림파를 형성해 훈구파와 대립했다. 연산군 4년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의 내용이 문제가 돼 부관참시 당했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로 이어져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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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출신
  3. 관직생활
  4. 조의제문
  5. 학풍

개요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출신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김수온(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관직생활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 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 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留鄕所)의 복립운동(復立運動)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復立節目)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조의제문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 추증이 논의되었고, 1708년(숙종 34)에는 김종직의 시호를 회복하기를 예조에서 상소하자 윤허했다. 이어 1709년(숙종 3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종직의 편지 서간
김종직의 편지 서간

학풍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을 이어받아 절의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또한 〈소학〉과 사서 및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의 사민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점필재집
점필재집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한편으로는 경술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사대외교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과 송시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을 다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김굉필·정여창,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손·유호인·조위, 사회적인 체제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방외인문학의 입장에 선 남효온(南孝溫)·홍유손 등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림파의 학문은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한때 침체했다가,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에 이르러서 크게 융성했다. 밀양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백연서원, 김천 경렴서원, 개령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편서에 〈동문수 東文粹〉·〈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彛尊錄〉 등이 있으며,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시호는 문충이다.→ 무오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