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학

기철학

다른 표기 언어 氣哲學

요약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체를 기(氣)로 보고, 모든 현상세계는 기의 운동과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철학체계.

학자에 따라 내용은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다음 몇 가지의 공통성을 갖는다.

먼저 이 세계의 궁극적 실체를 로 규정하고 만물의 현상적 전개는 기 운동의 소산이라 본다. 또한 기 운동과 작용의 원인을 기 자체에 있다고 보며, 근원적인 기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理)는 기의 내재적 법칙성 내지 속성으로 격하되고 독립적 실체성이 부정된다. 대표적인 기철학자로서 서경덕(徐敬德)·임성주(任聖周)·최한기(崔漢綺)·최제우(崔濟愚) 등을 들 수 있다.

서경덕은 주리철학(主理哲學)이 강조되던 16세기에 기철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천지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우주원형을 태허(太虛)라 하고 그것은 맑고 형체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크기가 끝이 없고 그 먼저 됨이 시작이 없다. 맑고 허(虛)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기는 비록 형태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으나 우주공간에 가득 차 실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만물이 구체적으로 생성되는가? 이를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설명한다.

한결같이 맑고 허한 기가 끝없이 공간에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이 크게 모여 하늘과 땅을 이루고 작게 모여 만물이 된다. 즉 한결같이 맑고 허한 기가 움직여 양(陽)을 낳고 고요하여 음(陰)을 낳은 처음부터 점차적으로 모여 한없이 넓고 두터워짐으로써 하늘·땅이 되고 인류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이 생기기 이전 형이상(形而上)의 본체세계는 선천이 되고, 만물이 생긴 이후의 형이하(形而下)의 세계는 후천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일기(一氣)의 미발(未發)한 본체가 선천인 것이고 이발(已發)한 현상이 후천이라 하겠다. 그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움직임과 고요함, 닫힘과 열림이 없을 수 없거니와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틀이 스스로 그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묘한 것이니 갑자기 뛰기도 하고 갑자기 열리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일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요 또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理)의 때라는 것이다.

이란 무엇인가? 기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이는 기의 주재이다.

이른바 주재라 함은 밖으로부터 와서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의 작용을 지시하여 그렇게 되는 근본의 바름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요 기가 시작이 없는 것이므로 이도 본래 시작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앞서는 것이라면 기가 시작이 있게 된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의 이란 기 자신의 운동법칙으로서 기와 대립하는 별개의 실체이거나 외부로부터 와서 기의 운동을 제어하는 주재자가 아니다. 기가 스스로 그 소이연(所以然)의 정당성을 잃지 않고 바르게 작용하도록 자율규제하는 내재적인 조리(條理)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는 기의 내재 속성으로 기의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 선천의 영역에서 다만 소질로서 잠자고 있을 뿐이고, 기의 운동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서경덕의 이는 전통적인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와는 다른 것으로 기 속에 내포된 이라 하겠다. 그는 또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기는 흩어질 뿐 소멸하지 않는다는 기불멸론을 주장하였다.

사람이 낳고 죽는 것, 인간·영혼 같은 것은 모두가 기의 뭉침과 흩어짐에 불과하다. 모이고 흩어짐은 있어도, 있고 없음은 없다. 그것은 기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 같은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기는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데 사람의 정신·지각 같이 크고 또 오래 걸려 뭉쳐진 것은 어떠하겠는가? 형체의 흩어짐을 보면 다 없어짐에 돌아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기의 작용은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기는 영원히 불멸한다 하여 기의 항존성(恒存性)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철학에 대해 이황(李滉)은 서경덕의 학문이 기수(氣數) 일변에 치우쳐 기를 이로 잘못 알고 있으며, 또한 기의 불멸을 주장하여 불교적 병폐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이황과 마찬가지로 서경덕이 기를 이로 알고 있는 병폐를 비판하지만, 그의 철학적 독창성과 함께 기의 지극히 오묘한 경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임성주는 서경덕의 기철학을 계승 발전시킨 18세기의 대표적인 기철학자이다. 그는 세계의 근원을 기라 하고 그것은 무한한 공간에 충만되어 있으며 시공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하였다. 근원의 원기(元氣)는 장재(張載)가 말한 태허·태화(太和)요, 서경덕이 말한 태허와 같다.

그는 모든 사물과 모든 현상, 오상(五常)과 오행(五行), 양의(兩儀), 태극(太極), 원기(元氣) 등 모든 것은 기에 붙어서 이름지은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덕(德)·원(元)·도(道)·건(乾)·신(神)·명(命)·제(帝)·태극(太極)이 모두 원기(元氣)·태허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만물은 기의 운동변화에 따라 생성되며, 기의 운동은 그 자체에 원인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는 전통 성리학에서 말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기에 내재하는 법칙성 내지 속성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이기묘합(理氣妙合)의 관계에서 보면 곧 기일분수(氣一分殊)와 같다고 주장한다.

즉 만일 일(一)에 대해 논한다면 다만 이(理)만 일(一)이 아니라 기(氣)도 역시 일(一)이고, 만일 만(萬)에 대해 논한다면 기(氣)만 만(萬)이 아니라 이(理)도 역시 만(萬)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기 밖에 이가 없다는 기철학적 관점에서 기일분수의 이론을 전개했음을 의미한다.

최한기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사변철학 내지 주리적(主理的) 전통과 결별하고 기 중심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기설(理氣說)의 기가 아닌 신기(神氣)라는 실체개념을 독자적으로 설정하여 그의 기철학을 전개한다. 신기는 천지만물의 근원적 실체로서 활동·변화하는 한 덩어리의 활물(活物)이며, 본래 순수하고 담박하여 맑은 바탕을 갖고 있다. 비록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에 따라 변하더라도 그 본성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기는 또 천지를 꽉 채우고 물체에 푹 젖어 있어 모이고 흩어지거나,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 기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는 천지의 용사(用事)하는 바탕이고 신(神)은 기(氣)의 덕이다.

또 신과 기를 함께 말하면 신은 기 가운데 포함되고, 신 하나만을 말하면 기의 공용(功用)으로 뚜렷이 드러난 것이므로 기가 바로 신이고 신이 바로 기인 것이다. 이처럼 그에 있어서 천지·인간·만물의 생성은 오직 기로써 설명된다. 최한기는 천에 대해서도 전통적 성리학의 해석을 거부하고 기에 의해 형성된 자연으로 이해한다.

그는 말하기를 천(天)은 곧 기이고 기는 곧 천이라 한다. 또 천이란 기가 쌓인 것의 총칭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천은 뜻없이 만물을 낳는 것이니 만물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며, 땅은 뜻없이 만물을 성장시키는 것이니 만물은 자기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천지의 의지·주재성 등을 부정하고 오로지 기의 소산인 자연으로서의 천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만물의 차별성을 기와 질(質)의 결합에서 찾는다.

기가 견고하게 엉키어 질이 된다. 우주의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기와 질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기를 천지의 기와 형태의 기로 구별한다. 천지의 기는 근원적인 기로서 무궁무진(無窮無盡)하여 불멸하나, 형체의 기는 질과 결합하여 만물을 이룬다. 기는 하나이지만 사람에 품부(稟賦)되면 사람의 신기가 되고, 물건에 품부되면 물건의 신기가 된다. 따라서 형체의 기는 만물의 생성소멸에 따라 생성소멸하며 소멸되면 천지의 기로 환원된다.

아울러 형체의 기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하지만 천지의 기는 영원불멸하는 것이어서 서경덕과 같이 기의 불멸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理)란 무엇인가? 그는 이를 실체개념으로 보지 않고 기의 조리 내지 내재적 속성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기가 있으면 반드시 이가 있고 기가 없으면 반드시 이가 없다 하여 이를 기 속에서 이해하였다.

최제우는 지기일원(至氣一元)을 만물 생성의 근원적 실체로 규정하고 모든 만물은 지기(至氣)의 현현(顯現)에 불과하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도 자연도 그리고 인간의 심신(心身)도 지기의 조화로 설명된다.

기는 허령창창(虛靈蒼蒼)하여 무슨 일에나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무슨 일이나 명령하지 않음이 없다.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려우며, 들리는 듯 하되 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또한 혼원(渾元)한 일기(一氣)이다. 지기는 천(天)·인(人)을 관통하는 우주의 생성력이며 만물의 조화력이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철학을 유물론으로 해석·이해하는데, 기가 곧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기일분수, 기일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