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

서경덕

다른 표기 언어 徐敬德 동의어 가구, 복재, 화담, 花潭
요약 테이블
출생 1489(성종 20)
사망 1546(명종 1)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완성했다. 대표작으로 <원이기>, <이기설>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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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가계 및 생애
  3.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개요

서경덕
서경덕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가계 및 생애

할아버지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호번(好蕃)이다.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기일원(氣一元)의 철학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를 선천설(先天說)로 설명했다.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이다.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라고 하니 허가 바로 기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기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포함한 천지만물은 기의 취산(聚散)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담연청허하면서 보편타당한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둘을 함유하여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한다. 둘은 곧 음양·동정(動靜)·감리 등을 가리킨다. 둘을 낳는 하나는 곧 그 음양이나 감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담연주일(淡然周一)한 기이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그는 이런 과정을 선천에 대해서 후천(後天)이라고 했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기의 운동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의 운동이 다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했다.

한편 그는 기의 취산에 따라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로 구별하여 보았다.

시원적인 기로서의 태허는 감각할 수 없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라고 했다. 즉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를 기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사생귀신은 오직 기의 취산에 불과하며, 그 취산은 결코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임을 설명했다.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했다. 또한 현실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대상복제에 대해 올린 상소에서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과 왕릉의 축조를 위한 채석의 노역동원에 따른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은 정주의 학설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므로, 서경덕의 기론에 대해 그가 이를 잘못 풀이했다고 비판했다. 이황은 "그의 견해는 별달리 정밀하지 못하다. 그의 학설을 보면 1편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고까지 비판했다. 이이도 "퇴계는 모방을 주로 하여 매끄럽게 꿰뚫는 맛이 없는 반면, 화담은 총명이 지나쳐서 스스로 얻은 견해가 많지만, 그 자득의 견은 더 향상이 되지 못하고 그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은 방만하기 쉬워 잃는 바가 있으므로 차라리 이황의 모방을 본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를 분명하게 터득한 것으로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송했다. 더욱이 이이는 서경덕의 기자이설을 취하여 이를 형식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 학파에 이어져 주기적(主氣的) 경향을 대표하게 되었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菡)·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에,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서경덕(徐敬德)
서경덕(徐敬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