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최제우

다른 표기 언어 崔濟愚 동의어 최복술, 崔福述, 수운, 水雲
요약 테이블
출생 1824(순조 24), 경북 경주
사망 1864(고종 1), 대구
국적 한국

요약 최제우는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인 동학의 교조이다. 동학은 서양에서 전래한 종교인 '서학'에 대하여 천도교를 이르는 이름이다. 최제우는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60년 종교체험 후,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이듬해 3월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형에 처해졌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성장기
  3. 수련과 득도
  4. 포교와 탄압
  5. 저술과 사상

개요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성장기

아버지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진립(震立)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았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2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으나 이미 동생의 아들 제환(濟寏)을 양자로 들였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10세 때에는 이미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화재까지 당하여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수련과 득도

1855년(철종 6)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 乙卯天書〉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梁山郡) 천성산(千聖山)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죽어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으며 다음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이후에도 울산 집에서 계속 공덕을 닦았으며,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무렵 어리석은 세상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포교와 탄압

최제우(崔濟愚) 동상
최제우(崔濟愚) 동상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여러 가지 소문도 떠돌게 되고 지방의 유림과 친척 중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하여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피신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 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 安心歌〉·〈교훈가 敎訓歌〉·〈도수사 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9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이후 그는 신도들에게 세상의 오해를 받기 쉬운 언행을 삼가하도록 경계했다. 한편 그가 무죄석방되자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가 더욱 용이해졌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저술과 사상

최제우
최제우

최제우의 글은 그가 처형당한 후 신도들에 의해 간행된 〈동경대전 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에 남아 있다. 〈포덕문 布德文〉·〈수덕문 修德文〉·〈논학문〉·〈불연기연 不然基然〉 등 한문으로 씌어진 4개 교의문은 〈동경대전〉에 실려 있고, 〈용담가 龍潭歌〉·〈몽중노소문답가 夢中老少問答歌〉·〈교훈가〉·〈도수사〉·〈안심가〉·〈흥비가 興比歌〉·〈권학가 勸學歌〉·〈도덕가 道德歌〉 등 8편의 한글 가사는 〈용담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4개의 교의문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지었고, 8편의 가사는 한글로 구송에 편하도록 쉽게 풀어썼다는 점에서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나 일반민중을 주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로서 한울님을 모시면 누구나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환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의 개념은 주술적인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민족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나 불교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운(運)이 다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봉건지배층이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 입장에서 서양을 남만으로 파악한 것과는 달리 그는 서양열강을 무사불성(無事不成)의 강대한 외래자로 보아 현실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왕조를 포함한 양반사회질서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자연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지상천국이 건설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했다. 한편 적서(嫡庶)나 반상의 구별없이 누구나 천주를 마음에 모시면 신분에 관계없이 군자가 된다고 하여 만민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관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