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

엘 그레코

다른 표기 언어 El Greco 동의어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Domenikos Theotokopoulos
요약 테이블
출생 1541년경, 크레타 섬 칸디아(이라클리온)
사망 1614년 4월 7일, 스페인 톨레도
국적 그리스

요약 16~17세기 스페인 미술의 거장으로 주요 작품은 <에스폴리오>와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과 <톨레도의 풍경>. 당시 베네치아 영토였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19세에 티치아노의 화실에 들어갔다. 1577년 스페인 톨레도로 이주하여,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 교회의 제단화를 시작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채색 기법은 베네치아의 것을 따랐지만 강렬한 색채와 대조는 그레코 고유의 것이었다. 말년에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신앙정신을 바탕으로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세 나라의 문화가 결합된 그의 독특한 화풍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20세기 이후 개성적인 예술가로 새롭게 평가 받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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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레코의 초기생애
  2. 그레코의 중기생애
  3. 그레코의 후기생애
엘 그레코(El Greco)
엘 그레코(El Greco)

그레코의 초기생애

엘 그레코는 자신이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그림에는 항상 이름을 그리스 문자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고 썼다. 그런데도 그는 보통 엘 그레코('그리스인'이라는 뜻)로 알려져 있다. 이 이름은 그가 이탈리아에 살고 있을 때 얻은 별명인데, 이탈리아에서는 사람을 이름 대신 태어난 나라 이름이나 출신 도시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엘'이라는 기묘한 형태의 관사는 베네치아 사투리이거나 스페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많다.

조국인 크레타 섬은 당시 베네치아 영토였고 자신도 베네치아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는 베네치아에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베네치아로 간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세 이후인 1560~66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당시 가장 위대한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화실에 들어갔다. 엘 그레코의 이탈리아 시절에 대해서는 극히 일부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1570년 11월 16일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을 위해 채식자로 일하던 줄리오 클로비오가 쓴 편지에는 '티치아노의 제자로 칸디아에서 온 젊은이'를 위해 파르네세 궁(宮)에 숙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1572년 7월 8일 파르네세의 관리가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리스 화가'라는 말이 나온다. 그뒤 1572년 9월 18일 '도미니코 그레코'라는 사람이 로마에 있는 성 루가 동업조합에 조합비를 납부했다. 엘 그레코가 로마에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인 1575~76년경 베네치아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엘 그레코가 이탈리아에서 그린 몇몇 작품은 전적으로 16세기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들은 노인들의 얼굴을 제외하고는(예를 들어 〈소경을 치료하는 그리스도 Christ Healing the Blind〉), 그가 유산으로 이어받은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깊은 공간 속에 인물을 배치하고 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배경건축을 강조하는 기법은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 Christ Cleansing the Temple〉 같은 초기 그림에서 특히 중요성을 띠고 있다. 엘 그레코의 비범한 초상화가로서의 재능은 이탈리아에서 그린 줄리오 클로비오와 빈센티오 아나스타지의 초상화에서 처음 입증되었다(→ 베네치아 학파).

그레코의 중기생애

1577년 봄 처음으로 스페인에 간 엘 그레코는 먼저 마드리드로 갔다가 나중에 톨레도로 옮겼다.

그가 스페인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심한 데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42㎞ 떨어진 엘 에스코리알에 산로렌초 수도원을 지으려는 펠리페 2세의 대규모 공사계획을 사전에 알았던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게다가 그는 파르네세 궁전의 도서관 사서이자 인문주의자인 풀비오 오르시니를 통해 로마에서 스페인의 주요 성직자들을 만났던 것이 확실하다. 이 무렵 잠시 로마를 방문했던 스페인 성직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루이스 데 카스티야)은 엘 그레코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 엘 그레코의 유언집행자 2명 가운데 하나로 지명되었다.

루이스의 형인 디에고 데 카스티야는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엘 그레코에게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었으며 이 주문은 엘 그레코가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이미 약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78년에 외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아이 어머니는 헤로니마 데 라스 쿠에바스 부인이었다. 헤로니마는 엘 그레코보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그는 헤로니마와 호르헤를 아내와 아들로 인정했지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 사실은 모든 전기작가들을 당황하게 했다.

엘 그레코가 마지막 유언장을 비롯한 많은 서류에서 헤로니마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크레타 섬이나 이탈리아에서 불행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합법적으로 맞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엘 그레코는 죽을 때까지 톨레도에 살면서, 그 주변지방의 교회나 수도원에서 주문을 받고 바쁘게 일했으며 이름있는 인문주의자와 학자 및 성직자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건축가인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의 아들이며 고전학자인 안토니오 데 코바루비아스는 그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자 그의 친구였다.

스페인의 삼위일체 수도회 총회장이며 설교자로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총애를 받았던 프라이 호르텐시오 파라비시노는 엘 그레코에게 4편의 소네트(14행시)를 바쳤는데, 그 중 하나는 엘 그레코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노래한 것이다. 16세기말의 중요 문필가인 루이스 데 공고라 이 아르고테는 화가의 묘비에 새길 소네트를 지었다. 역시 문필가인 돈 페드로 데 살라사르 데 멘도사는 엘 그레코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가 죽은 뒤에 작성된 재산목록은 그가 대단히 교양 있는 사람이며 진정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색인:인문주의). 그의 장서를 보면 관심 분야가 얼마나 폭넓고 다양했는가를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리스의 주요 작가들이 그리스어로 쓴 저서와 수많은 라틴어 서적, 이탈리아어 및 스페인어 서적 등이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Bioi éloi〉, 페트라르카의 시집(詩集),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오를란도 푸리오소 Orlando Furioso〉, 그리스어 성서, 트리엔트 공의회 의사록, 그리고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자코모 다 비뇰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안드레아 팔라디오,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등이 쓴 건축학 논문들도 있으며, 엘 그레코가 직접 그림을 곁들여 비트루비우스의 저서를 개정판으로 만든 것도 있지만 이 필사본은 소실되었다.

1585년부터 엘 그레코는 마르케스 데 비예나라는 중세 말기 양식의 대저택에서 살았다.

지금은 파괴된 이 대저택과 가까웠던 톨레도에 있는 '카사 이 무세오 델 그레코'(엘 그레코의 집과 박물관)에서 한번도 산 적이 없었다. 사치스러운 생활공간보다는 화실로 사용할 공간이 그에게 더 필요했던 것이다. 1605년에 역사가 프란시스코 데 피사는 그의 저택을 톨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꼽았다. 그 저택은 일부 낭만적인 작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황폐한 건물은 아니었다. 죽었을 때 많은 재산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상당히 안락한 생활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서 받은 첫번째 주문은 톨레도에 있는 산토도밍고엘안티구오 수도원 교회의 중앙 제단과 2개의 측면 제단을 위한 제단화(1577~79)였다.

그가 이만큼 중요하고 규모가 큰 주문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베네치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건축양식을 연상시키는 제단 틀의 건축설계도 그가 맡았으며, 중앙 제단에 그린 〈성모 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에서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그의 예술인생은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인물들은 앞쪽에 가까이 배치되었고 사도들의 그림에서 색깔은 새로운 광채를 얻었다.

물감을 칠하는 기법과 흰색 강조 부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기법은 여전히 베네치아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조화를 깨뜨릴 만큼 강렬한 색채와 뚜렷한 대조는 분명 엘 그레코 특유의 것이다.

특히 중앙 제단 위쪽에 그린 〈삼위일체 Trinity〉(지금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소장)에는 그가 미켈란젤로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나 있으며 벌거벗은 그리스도의 힘차고 조각한 듯한 육체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측면 제단에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 Resurrection〉에서도 서 있는 군인들의 자세와 잠들어 있는 군인들의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몸의 상체와 하체의 방향이 반대되는 자세)는 그가 미켈란젤로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무렵 엘 그레코는 놀랄 만큼 독창적인 또 하나의 걸작 〈에스폴리오 Espolio〉('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라는 뜻)를 탄생시켰다.

그가 그림 앞면에 수직적이고 빽빽한 구도를 설정한 것은 그리스도가 잔인한 고문자들에게 억압받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마니에리스모 화가라고 부르는 16세기 중기와 말기의 이탈리아 화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간소거법(空間消去法)을 채택했으며 동시에 머리 위에 머리를 줄줄이 겹쳐 놓아 수많은 군중을 표현하는 후기 비잔틴 회화의 기법을 되살려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설계한 금도금한 나무로 만든 원래의 제단은 파괴되었고 그가 조각한 〈성 일데폰소의 기적 Miracle of St. Ildefonso〉이라는 작은 군상만 제단 틀 아래쪽 중앙에 남아 있다.

사람의 모습을 길쭉하게 그리는 엘 그레코의 경향은 이 시기에 더욱 뚜렷해졌는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성 세바스티아누스 St. Sebastianus〉가 좋은 본보기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베네치아의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의 그림, 그리고 주요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의 작품에서 사람의 몸을 극단적으로 길게 늘여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경배하는 성직자들 Christ on the Cross adored by Donors〉에서 극적인 구름의 형상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길쭉한 몸이 더욱 가늘게 표현된 것은 엘 그레코의 후기 양식을 예고해 준다.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궁정과 맺은 관계는 짧았고 별로 순조롭지 못했다.

〈신성동맹 우의화 Allegory of The Holy League〉(〈펠리페 2세의 꿈 Dream of Philip Ⅱ〉, 1578~79)에 이어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Martyrdom of St. Maurice〉(1580~82)를 그렸는데, 2번째 그림은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당장 똑같은 주제로 다른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했고 이로써 이 위대한 예술가와 스페인 궁정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왕은 성 마우리티우스를 포함한 주요집단의 군청색 옷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충격적일 만큼 눈부신 노란색이 마음에 안들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요즘 사람들에게는 엘 그레코의 대담한 색채사용이 특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색채가 형태를 암시하는 기법과 공간을 자유롭고 환상적이며 몽롱하게 창조하는 기법에는 베네치아 양식의 붓놀림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Burial of the Count de Orgaz〉(1586~88)은 엘 그레코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위에 있는 천상의 초자연적인 광경과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인상적인 초상들은 이 비범한 천재 예술가가 가진 모든 면면을 드러내고 있다.

엘 그레코는 하늘과 땅을 명확하게 구별했다. 위쪽에 있는 하늘은 반추상적인 형태로 소용돌이치는 차가운 구름으로 표현하였으며, 성자들은 키가 크고 환영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반대로 아래쪽에 있는 인물들은 크기와 균형이 모두 정상적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누스가 기적처럼 나타나 백작이 그들의 교회에 베푼 자비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시신을 무덤 속에 눕혔다고 한다. 황금색과 붉은색 옷을 입은 그들은 경건히 몸을 굽혀 백작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으며, 오르가스 백작이 입고 있는 화려한 갑옷은 다른 인물들의 노란색조와 붉은 색조를 반사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어린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인 호르헤 마누엘로 그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손수건에는 화가의 서명과 이 소년이 태어난 해인 1578년이라는 연대가 적혀 있다.

16세기 당시의 옷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톨레도 상류사회의 유명인사들이다. 모든 행동이 그림의 정면에서 이루어지는 이 그림에는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따른 엘 그레코의 구성법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레코의 후기생애

1590년부터 죽을 때까지 엘 그레코는 놀랄 만큼 많은 작품을 창조했다.

톨레도 지역의 교회와 수녀원에 그린 작품 중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가정 Holy Family with the Magdalen〉과 〈성녀 안나와 성가정 Holy Family with St. Anne〉 등이 있다. 그는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뇌 Agony in the Garden〉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그렸는데, 여기에서는 이상한 모양과 찬란하고 차가우며 상충하는 색채들이 초자연적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Christ Carrying the Cross)라는 종교적 주제는 그의 11점의 원작과 수많은 모사화에서 다루어졌다.

그는 주요 성인들을 거의 전부 그렸는데 성 도미니코, 마리아 막달레나, 추기경의 모습을 한 성 예로니모, 참회하는 성 예로니모, 눈물을 흘리는 성 베드로 등과 같이 똑같은 구도를 되풀이해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가장 즐겨 다룬 성인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으며 스페인 화가이자 미술이론가인 프란시스코 파체코가 1611년 그를 방문한 뒤, 그야말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프란치스코를 가장 잘 묘사한 사람이라고 단언한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그린 원작 가운데 약 25점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제자들이 그린 것은 100점이 넘는다. 여러 종류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죽음을 명상하는 성 프란체스코와 형제 레오 St. Francis and Brother Leo Meditating on Death〉였다.

또한 그리스도와 12사도를 13폭의 화폭에 묘사한 연작 〈사도들 Apostolados〉을 여러 편 그렸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2편뿐이다. 하나는 톨레도 성당의 성물안치소(1605~10)에 있고, 미완성인 또 한 작품(1612~14)은 톨레도에 있는 '엘 그레코의 집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들 연작에 그려진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정면 모습은 중세 비잔틴 양식의 인물을 연상시키지만, 색채와 붓놀림은 베네치아 기법을 다루는 엘 그레코의 독창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의 강렬한 종교적 분위기는 반(反)종교개혁시대의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신앙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았고 예술적 바탕은 이탈리아인이었지만, 그는 스페인의 종교적 분위기에 너무 깊이 젖어들어 스페인의 신비주의를 시각예술로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3가지 문화의 결합 때문에 그는 어떤 전통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개성적인 예술가였으며 감정에 호소하는 강력한 힘과 상상력을 지닌 고독한 천재였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톨레도에 있는 산호세 예배당의 제단화 3점(1597~99), 마드리드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도냐마리아 데 아라곤 수도원을 위한 그림 3점(1596~1600), 이예스카스에 있는 라카리다드 병원을 위한 대제단화와 네 측면 제단화, 그리고 그림 〈성 일데폰소〉(1603~05) 등 몇 가지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인간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한 것이 엘 그레코의 후기 작품이 갖는 특징이다.

자신이 묻힐 예배당을 위해 1612~14년에 그린 〈목자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가 좋은 본보기이다. 양치기와 천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의 기적을 찬양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 조화를 이루지 않는 화려한 색채와 이상야릇한 모습이나 자세는 경탄과 황홀감을 자아낸다. 미완성인 〈성 요한의 계시 Vision of St. John〉에서 엘 그레코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자연의 법칙을 한층 더 무시하고 있다.

추상적으로 채색된 차가운 푸른색 옷을 입고 격정에 몸을 떨고 있는 복음사가 요한의 거대한 형상은 구원을 외치는 순교자들의 영혼을 계시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래 산비센테 교회에 있던 〈무원죄잉태 Immaculate Conception〉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길쭉하게 일그러진 천사들에게 떠받들려 황홀경 속에서 하늘로 날아간다.

아래쪽에 추상적으로 그려져 있는 톨레도의 환상적인 풍경은 희미한 달빛 속에서 매혹적이고,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는 장미와 백합들은 비할 데 없이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3점의 풍경화에서 엘 그레코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극적으로 표현하는 특유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톨레도의 풍경 View of Toledo〉(1595경)에 묘사된 도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배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불길한 먹구름에 휩싸여, 폭풍우가 몰아칠 것처럼 스산하고 흥분에 싸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 나오는 건물들을 자신이 설정한 구도에 맞추어 재배열했다. 〈톨레도의 풍경과 설계도 View and Plan of Toledo〉(1610~14)는 모든 건물이 반짝이는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마치 환상처럼 보인다.

엘 그레코는 화폭에 적어넣은 명문에서, 산후안바우티스타 병원을 앞쪽의 구름 위에 그린 것은 더욱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림 속의 지도는 톨레도 시내를 나타낸다고 기발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 있는 강의 풍경은 높은 바위산 위에 세워진 톨레도 시를 휘감아 흐르는 타호 강을 나타낸다.

엘 그레코는 이탈리아와 로마에서도 살았지만, 고대 로마의 고전적 주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그토록 즐겼던 신화적 주제를 다룬 유일한 작품은 〈라오콘 Laocoon〉이다. 그는 무대를 고대 트로이 대신 위에서 설명한 것과 비슷한 톨레도 풍경으로 바꾸었고, 표현은 풍부하지만 볼품없이 손발을 벌리고 드러누워 있는 신관(神官) 라오콘의 거대한 몸을 그릴 때는 고전적인 전통을 거의 무시했다.

엘 그레코는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룬 화가였지만, 초상화도 비록 작품수는 적어도 종교화 못지 않게 훌륭하다. 그의 후기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두 초상화는 〈펠릭스 오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Fray Felix Hortensio Paravicino〉(1609)와 〈돈 페르난도 니뇨 데 게바라 추기경 Cardinal Don Fernando Niño de Guevara〉(1600경)이다.

라파엘로 이후 중요 성직자의 초상화는 앉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 2점의 초상화도 앉은 자세로 그렸다.

삼위일체회의 수사이자 유명한 웅변가이며 시인인 파라비시노는 민감하고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자세는 기본적으로 정면자세이며, 하얀 수사복과 검은 망토는 시각적으로 효과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진홍빛 예복 차림의 니뇨 데 게바라 추기경은 명령하는 데 익숙한 사람답게 거의 전율적일 만큼 정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헤로니모 데 세바요스 Jeronimo de Cevallos〉(1605~10)의 초상은 가장 동정심을 끄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반신상인 이 작품의 색채는 엷게 채색된 흰색과 검은색뿐이며 당시 유행했던 거대한 주름 칼라가 온화한 얼굴을 감싸고 있다. 엘 그레코는 이처럼 단순한 기법으로 기억할 만한 훌륭한 성격묘사를 창조하여 티치아노 및 렘브란트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톨레도의 산토도밍고엘안티구오 예배당에 있는 가족묘지에 묻혔는데,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 수녀들과 말다툼을 벌인 일 때문에, 가족묘지는 산토르콰토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세기 전에 그 교회가 파괴되면서 이 예술가의 무덤은 현재 아무런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