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세이

간세이

[ 寬政(관정) ]

요약 일본 에도시대의 왕 고카쿠가 사용한 연호(1789~1801년).
원어명 かんせい

일본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왕 고카쿠[光格, 재위 1780~1817] 때의 두 번째 연호이다. 1789년 음력 1월부터 1801년 음력 2월까지 13년 동안 쓰였다. 이 시기에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齊, 재임 1787~1837]였다. 

일왕 고카쿠는 교토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자, 1789년(덴메이 9) 2월 19일(음력 1월 25일)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덴메이[天明]’에서 ‘간세이[寛政]’로 바꾸었다. 간세이 연간에 노중(老中)의 수좌로서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보좌하며 막부의 정무를 주도하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간세이 개혁’이라고 불리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검약령(儉約令)을 선포했으며,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술 제조를 억제했다. 아울러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가 추진했던 표기화폐(表記貨幣)인 남료이주은(南鐐二朱銀)의 주조를 중단시키고, 무게를 기준으로 은의 함량이 정해진 평량화폐(秤量貨幣)인 정은(丁銀)을 부활시켰다. 1793년(간세이 5) 음력 7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실각했으나, 그의 뒤를 이어 노중 수좌의 지위에 오른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松平信明]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개혁 정책을 이어서 추진했다. 

한편, 간세이 연간인 1791년(간세이 3)에 조정은 막부의 반대에도 일왕 고카쿠의 아버지인 스케히토 친왕[典仁親王]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부여하였다. 이는 막부와 조정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아울러 1798년(간세이 10) 2월 16일(음력 1월 1일)에는 〈보력력(寶曆曆)〉에서 〈관정력(寛政曆)〉으로 역법이 바뀌었다. 서양의 천문학을 받아들여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와 하자마 시게토미[間重富] 등이 제작한 〈관정력〉은 1844년 〈천보력(天保曆)〉으로 바뀔 때까지 46년 동안 사용되었다.

일왕 고카쿠는 신유년(辛酉年)인 1801년(간세이 13) 3월 19일(음력 2월 5일)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교와[享和]’로 바꾸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 도참설의 영향으로 신유년과 갑자년(甲子年)을 천명(天命)이 바뀌는 해로 여겨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호를 바꾸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조항목

연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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