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메이

덴메이

[ 天明(천명) ]

요약 일본 에도시대의 왕 고카쿠가 사용한 연호(1781~1789년).
원어명 てんめい

일본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왕 고카쿠[光格, 재위 1780~1817] 때의 첫 번째 연호이다. 1781년 음력 4월부터 1789년 음력 1월까지 9년 동안 쓰였다. 이 시기에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이에하루[徳川家治, 재임 1760~1786]와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齊, 재임 1787~1837]였다. 

일왕 고카쿠는 1779년(안에이 8) 12월 6일(음력 10월 29일) 일왕 고모모조노[後桃園]가 태어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요시코 내친왕[欣子内親王]만 남기고 죽자, 구조 히사자네[九条尚実] 등에게 추대되어 1780년 1월 1일(안에이 8년 음력 11월 25일)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1781년(안에이 10) 4월 25일(음력 4월 2일)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안에이[安永]’에서 ‘덴메이[天明]’로 바꾸었다. 

덴메이 연간인 1781년(덴메이 1) 음력 윤5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사촌인 도쿠가와 하루사다[徳川治濟]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1782년(덴메이 2)에는 냉해로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면서 이른바 ‘덴메이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1783년(덴메이 3) 음력 3월과 음력 7월에 잇달아 나타난 이와키산[岩木山]과 아사마산[浅間山]의 분화로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냉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래서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기근이 발생했다. 1788년(덴메이 8)까지 계속된 이 기근으로 전국에서 수만 명이 굶어죽었다. 그리고 1787년(덴메이 7) 음력 5월에는 에도와 오사카 등의 전국 주요 도시들에서 물가의 폭등 등에 반발한 대규모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막부의 정책을 주도하던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가 실각되는 배경이 되었다. 

1786년(덴메이 6) 9월 17일(음력 8월 25일)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50세의 나이로 죽자,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15세의 나이로 쇼군의 지위를 이었다. 그는 1787년(덴메이 7) 4월 23일(음력 3월 6일)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정식으로 에도 막부의 제11대 쇼군 지위에 올랐다. 그 해 음력 6월 시라카와번[白河藩]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다누마 오키쓰구를 대신해서 노중(老中)의 수좌 지위에 올라 개혁을 추진했다. 

일왕 고카쿠는 교토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자, 1789년(덴메이 9) 2월 19일(음력 1월 25일)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간세이[寛政]’로 바꾸었다.

참조항목

연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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