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무

보상무

[ 寶相舞 ]

요약 조선후기에 창재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

순조(1800~1834) 때 효명세자(1809~1830)가 김창하(金昌河)의 도움으로 창제됐다. 이 정재(呈才)를 포함한 새 향악정재 24종목은 대부분 무자년(1828) 『진작의궤』(進爵儀軌)와 기축년(1829) 『진찬의궤』(進饌儀軌) 및 무신년(1848) 『진찬의궤』에 도설됐다. 새 향악정재의 춤사위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1893)에 전한다. 정재의 반주음악은 "향당교주"(鄕唐交奏)이다.

이 정재는 6명 또는 14명의 무동(舞童)이나 8명의 여기(女妓)가 두 명씩 짝지어서 춤을 추다가 보상반(寶相盤)에 채구(彩毬)를 넣으면 상으로 꽃을 받고 넣지 못하면 벌로 뺨에 먹칠하며 노는 일종의 유희무(遊戲舞)의 일종이다. 보상무의 창사(唱詞)가 당악정재인 포구락(抛毬樂)의 창사와 비슷한 것도 그렇고, 패로 갈라 채구 넣기 시합하여 성공 여부에 따라 꽃이나 먹칠을 하는 것도 포구락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소재 보상무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 소재 보상무

이 정재에 출연하는 무동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벽라포(碧羅匏)·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을 입고, 학정대(鶴頂帶)에 무우리(無憂履)를 신는다고 장사훈(張師勛)의 『韓國傳統舞踊研究』에 나온다. 순조 기축년(1829) 『진찬의궤』와 무자년(1828) 『진작의궤』에 의하면, 보상무의 예제창사(睿製唱詞)는 다음과 같다.

"취막화연요서일(翠幕華筵耀瑞日) 기라천대호신장(綺羅千隊好新粧)."

1901년(광무 5) 고종황제의 탄신50주년기념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진연(進宴) 때 공연된 정재(呈才)의 한 종목이 보상무이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3.985~86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347~48, 525쪽
  •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년, 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