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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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왕의 개운포(開雲浦) 유람 중에 나타난 동해용의 아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왕의 개운포(開雲浦) 유람 중에 나타난 동해용의 아들로, 그 실체에 대해서는 신(神)으로 보는 견해, 역사적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 신과 인간을 겸한 무격(巫覡)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의하면, 처용(處容)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때 왕의 개운포(開雲浦) 유람 중에 나타난 동해용의 아들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이 개운포(開雲浦)에 유람하고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하니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였고, 급간(級干)의 관직(官職)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그런데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이에 역신이 감동하여, 이후로는 처용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것을 피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처용(處容)에 대한 연구성과는 크게 국문학계의 연구와 역사학계의 연구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향가가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국문학계의 연구 성과가 많다. 국문학 내에서도 문학, 어학, 민속학, 연극사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최용수, 1993; 김영수, 1999) 단일 기록에 대한 것으로는 어떤 주제보다 연구 성과가 많이 축적되어 있는 부분이다.

처용(處容)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찍이 “제용(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으로 보았고(양주동, 1942), 『계림유사(鷄林類事)』의 “용왈칭(龍曰稱)”이라는 기록에 착안하여 처용(處容)을 반절(半切)로 읽을 때 “춍”이 된다고 하면서 그 뜻을 용(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용”자가 들어있는 지명에서 “용”의 훈독음이 ku, kus, kut으로 되는데, 이 역시 처(處)의 훈독음과 일치한다고 하였다.(김용구, 1956)

한편, 처용을 무(巫)를 의미하는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과 연계시켜 사제자를 의미하는 “즁” “츙”의 한자음으로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김동욱, 1961)

처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신(神)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는 용신사상 및 호국불교라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인데, 이에는 지방 호족 세력으로 보는 견해와 이슬람상인으로 보는 견해 및 화랑(花郞)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학성, 1995) 셋째, 신과 인간을 겸한 무격(巫覡)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서대석, 1975)

국문학계의 연구 중에서는 민속학 및 연극사적 입장에서 접근한 연구들이 주목된다. 처용랑망해사조 기사의 노래와 춤은 신라 하대에 행해졌던 굿 혹은 벽사의례와 관련있는 것으로, 처용가무는 단순한 가무가 아닌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일정한 사회비판적 역할을 했다는 견해가 있다.(조동일, 1976) 여기서 더나가서 당대의 굿이 가진 사회적 기능까지 언급하면서, 당대의 역사적 현실 해명에 많은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임재해, 1999)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처용이 신라 변방에서 일어난 호족의 상징이고, 역신(疫神)은 왕도의 타락한 귀공자들의 상징이며, 각 가무 속에 등장한 신(神)들은 6두품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처용이 상경하여 신라 왕정을 보좌한 것은 기인제도의 시초였다고 보면서,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적용하기도 하였다.(이우성, 1969)

이 역사학계의 해석을 민속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변형시킨 연구가 있는데, 처용을 헌강왕과 진골세력을 대변하는 존재로, 역신들을 지방호족 세력으로 해석하고, 처용가는 헌강왕이나 헌강왕의 의식을 대변한 자가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 연구가 있다.(박진태, 1984)

국내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라, 활발한 국제교역을 하던 당시의 대외교류를 염두에 두고 처용을 해석하기도 했다. 곧, 용은 물을 상징하므로, 처용이 동해용의 아들로 나오는 것은 당시 해상을 무대로 활동하던 교역상인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며, 처용은 멀리 서역에서 온 상인으로 헌강왕대에 왕정을 경제적으로 보좌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이용범, 1969)
아랍세계와 신라와의 교류를 보다 폭넓게 구체적으로 고찰하면서, 처용을 서역인으로 간주한 견해를 보완한 견해도 있다.(무함마드 깐수, 1992)

한편, 헌강왕(憲康王)의 예술적 관심과 조예에 포착하여 문화사적 시각으로 처용을 해석하고자 하면서, 처용은 당시인들이 동해용이 점지해 주었다고 믿었던 헌강왕의 아들 효공왕(孝恭王)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헌강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효공왕 요(嶢)는 모계(母系)가 불분명하지만 진성여왕에 의해 헌강왕의 아들로 인정받음으로써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처용은 동해용의 점지로 얻은 왕자이며, 망해사를 신방사라 하는 것은 헌강왕이 이곳에 행재소를 세우고 신방을 차린 것이라 한다. 처용의 외모가 눈이 깊고 코가 높다는 것을 효공왕의 체모가 괴걸하다고 한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았다. 그리고 역신(疫神)과의 관계는 처용, 즉 효공왕이 모친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진성여왕대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며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왕으로서의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장치로 보았다.(김기흥, 2001)

처용랑의 존재를 헌강왕대의 잦은 의례행위와 관련시키면서 화랑조직과 관련시킨 견해도 있다. 잦은 의례행위의 배경에는 지방사회의 수탈에 근거를 두고 비대해져 있던 신라 왕경사회의 현실적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해결방안이 아닌 종교적 왕실의 권위를 통해 정신적 융합을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이를 주도한 것은 헌강왕대의 실세이던 위홍이었고, 처용이라는 존재는 벽사축귀와 기복을 행한 화랑조직의 일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전기웅, 2005)

처용랑(處容郞)이라는 명칭에는, 처용이 화랑이라는 내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낭(郞)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화랑이 악(樂)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존재라는 견해가 있으므로(유동식, 1975), 화랑은 가무(歌舞)를 통해서 액을 물리치는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였으며(이기동, 1984), 처용 역시 가무(歌舞)를 통해 재액(災厄)을 물리치는 직능을 갖춘 화랑이었으므로 처용랑(處容郞)이라 불리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처용의 역할은 종교적 의례악을 담당한 자였으며, 헌강왕과 함께 서라벌로 돌아와 급간의 벼슬을 받았다는 대목은, 그가 어느 시기에 헌강왕에 의해 국가공식악의 주관자로 등용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였다.(권주현, 2007)

처용설화와 관련하여『삼국사기(三國史記)』 권11 신라본기(新羅本紀)11 헌강왕(憲康王) 5년(879) 3월조에는,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巡幸)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일컬었다.『고기』에서는 왕의 즉위 원년의 일이라고 하였다.(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舞 形容可駭 衣巾詭異 時人謂之山海精靈 古記謂 王卽位元年事)”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헌강왕이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했으며,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점에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조의 기록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헌강왕에게는 아들 한 명과 딸 둘이 있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던 해(887년 7월)에 돌이 채 안된 아들 요(嶢, 효공왕)가 있었으므로, 딸 둘은 요(嶢)보다 먼저 태어났다. 딸 한 명은 요(嶢)의 뒤를 잇는 53대 신덕왕(神德王)의 비(妃) 의성왕후(義成王后)이며, 또 다른 한 명은 55대 경순왕(敬順王)의 어머니이며 효종랑(孝宗郞)의 아내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결국 헌강왕은 늦도록 아들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사후 왕위 계승은 동생인 정강왕, 진성여왕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왕위계승이 순조로웠던 것은 어쩌면 이 왕들의 숙부인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위홍이 죽고 난 후에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아들 요(嶢, 효공왕)에게 양위를 한다.

그런데 효공왕도 아들이 없이 죽자, 이후 신라의 왕위는 박씨인 신덕왕(神德王)이 국인(國人)에 의해 추대된다. 여기서 국인의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었다는 신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묘연하다. 이에 『삼국유사』 기이편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처용(處容) 설화는 헌강왕 이후 동해 용왕의 아들로 여겨진 새로운 왕의 등장을 예견한 이야기이며, 이를 신라 하대 박씨 왕계의 등장과 연관지어 보아, 처용의 실체가 신덕왕(神德王)의 아버지인 이간(伊干) 문원(文元)이라는 견해가 있다. 특히 김씨 중에서도 정강왕대에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부인이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인 효종랑(孝宗郞)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씨인 신덕왕이 국인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사실은, 처용이 역신(疫神)을 물리친 행위로 인해 사람들의 대중적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과 연결된다고 하였다.(박인희, 2008)

『삼국사기』에 의하면 53대 신덕왕(神德王)은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예겸(乂謙, 銳謙)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 왕비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는 신덕왕의 어머니 정화부인(貞花夫人)이 아달라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해간(海干) 문관(文官)의 아들인 이간(伊干) 문원(文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 의부(義父)가 예겸각간(銳謙角干)으로 선성대왕(宣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신덕왕의 어머니 정화부인을 중심으로 한 아버지인 문원과 의부인 예겸의 관계는, 처용의 아내를 중심으로 한 처용과 역신(疫神)의 관계에 견주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용의 실체는 바로 신덕왕의 아버지이며 해간(海干) 문관(文官)의 아들로 나타나는 이간(伊干) 문원(文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박인희, 2008)

다음으로, 역신(疫神)이 아내를 겁탈할 때 처용이 불렀다는 신라 향가 처용가(處容歌)에 대한 두 가지 해독본을 제시한다.

?ㅣ? ?긔 ?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 자리 보곤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ㅣ 내해다마?
아?? 엇디?릿고 (양주동, 1942,『朝鮮古歌硏究』, 博文書館)

東京 ?기 ?라라
밤 드리 노니다가
드러? 자?ㅣ보곤
가로리 네히러라
두?른 내해엇고
두?른 누기핸고
본?ㅣ 내해다마??
아?? 엇디?릿고 (김완진, 1980,『鄕歌解讀法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신라 향가인 처용가는 뒷날 고려가요인 처용가로 발전했고, 또 처용무(處容舞)가 생겨 궁중 의식에서 즐겨 추는 춤이 되었다.『악장가사(樂章歌詞)』에 수록된 고려 처용가에는 헌강왕이나 나라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일은 과거 헌강왕 시대에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일이 되었으며, 그 주체도 과거의 처용과 나라사람들이 아니라 현재 활동하고 있는 처용 및 현재 고려 처용가를 부르는 연행자 자신으로 바뀌었다.(정운채, 1998)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악학궤범(樂學軌範)』 권7 연화대복식도설(蓮花臺服飾圖說)에는 처용가와 함께 처용탈 그림이 실려있다. 이를 편찬한 성현(成俔)의 장편시 ‘처용’에는 미약한 역신(疫神)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으며, 여기서 처용은 역신을 물리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역신은 전근대인 모두가 두려워하고 믿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기에, 벽사진경(?邪進慶)을 상징하는 처용무(處容舞)가 고려-조선시대 궁중에서 연희되었던 것이다.(송수환, 2007)

참고문헌

양주동, 1942, 『朝鮮古歌硏究』, 博文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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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환, 2007,『울산의 역사와 문화』, 울산대학교출판부.
박인희, 2008,『삼국유사와 향가의 이해』, 월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創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隱吾下於叱古 二?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大王)은 개운포(開雲浦)[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 유람하였다. 왕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여,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용(東海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뜻이 머무르게 하고자 하였고, 또 급간(級干)의 관직(官職)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것을 피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돌아와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점지하여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는데,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이름하였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는 보지 못했으나, 왕만 홀로 그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이 몸소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神)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혹은 이미 신(神)이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본떠 새겨서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 한다고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는 그 형상으로 그를 일컬은 것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신(北岳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므로, 옥도검(玉刀鈐)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이름하였다.『어법집(語法集)』에 이르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 등이라고 하였다.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都邑)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이른다. 이에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여겨 탐락(耽樂)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