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백석

분류 문학 > 인물 > 일반

기본정보

고구려에서 신라에 파견되었던 첩자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고구려에서 김유신을 해칠 목적으로 신라에 파견했던 첩자로, 김유신을 고구려로 유인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붙잡혀 죽었다.

전문정보

백석(白石)은 김유신을 해칠 목적으로 고구려에서 신라에 파견했던 첩자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 따르면 김유신은 진평왕 17년(595)에 태어나 나이 18세 되던 때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이 때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는 백석이란 자가 낭도(郎徒)의 무리에 오랫동안 섞여 있었다고 한다. 김유신은 당시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 위해 밤낮으로 무리와 함께 모의하고 있었고, 백석은 이를 보고 김유신에게 먼저 적국의 사정을 염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면서 김유신을 고구려로 유인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백석과 함께 길을 나섰는데, 그들이 골화천(骨火川: 경북 영천)에 이르렀을 때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의 세 호국신(護國神)이 나타나 백석이 김유신을 거짓으로 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유신은 골화관(骨火館)에 이르러서 백석에게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다시 그것을 가지러 가야겠다고 하고는, 집에 돌아와 백석을 결박하고 그 사정을 물었다. 이에 백석은 자신이 본래 고구려 사람이며, 고구려 본국에서는 고구려에 원한을 가지고 복수를 맹세하면서 죽은 복서지사(卜筮之士) 추남(楸南)이 신라에서 환생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라고 여겨, 자신을 보내 일을 꾸미려고 한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김유신은 백석을 처형하고 음식을 갖추어 자신에게 계시를 준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백석과 관련된 이야기는 삼국통일을 달성한 영웅 김유신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설화적 색채가 강하지만, 그 내용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석은 전쟁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첩자”였다는 점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신라에 보낸 첩자 백석이 이미 전부터 화랑에 들어가 낭도로 행세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구려는 자신들의 치밀한 첩보망을 통해 장차 신라를 이끌 재목으로 일찍부터 김유신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임무를 첩자 백석에게 맡겼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백석은 신라에 잠입하여 화랑이 된 뒤 여러 해 동안 낭도들과 어울리며 기회를 기다렸다. 이는 고구려의 첩자 활동이 단순히 상대의 동정을 살피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적국의 요주의 인물 즉 요인(要人)을 제거하거나 포섭하는 적극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이는 김유신이 이후 첩자 활용과 첩보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자극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고 한다.(김영수, 2007)

참고문헌

김영수, 2007, 「김유신의 첩자활용과 첩보술에 관한 일연구」『軍史』6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
金庾信
<武>力伊干之子 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時有白石者 不知其所自來 屬於徒中有年 郞以伐麗<濟>之事 日夜深謀 白石知其謀 告於郞曰 僕請與公密先探於彼 然後圖之何如 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至 公與三娘子喜話之時 娘等以美菓?之 郞受而啖之 心諾相許 乃說其情 娘等告云 公之所言已聞命矣 願公謝白石 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 再拜而出 宿於骨火? 謂白石曰 今歸他國忘其要文 請與爾還家取來 遂與還至家 拷縛白石 而問其情 曰 我本高麗人[古本云百濟 誤矣 楸南乃高麗之士 又逆行陰陽亦是寶藏王事] 我國群臣曰 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古本作春南 誤矣] 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 尤反覆之事] 使其卜之 奏曰 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 其瑞如此 大王驚怪 而王妃大怒 謂是妖狐之語 告於王 更以他事驗問之 失言則加重刑 乃以一鼠藏於合中 問是何物 其人奏曰 是必鼠 其命有八 乃以謂失言 將加斬罪 其人誓曰 吾死之後 願爲大將 必滅高麗矣 卽斬之 剖鼠腹而視之 其命有七 於是知前言有中 其日夜大王夢 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 以告於群臣 皆曰 楸南誓心而死 是其果然 故遣我至此謀之爾 公乃刑白石 備百味祀三神 皆現身受奠 金氏宗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財買谷 每年春月 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百卉敷榮 松花滿洞府林 谷口架築爲庵 因名松花房 傳爲願刹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武>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김유신(金庾信)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고, 그 동생은 흠순(欽純)이다. 누이동생은 보희(寶姬),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이고 그 동생은 문희(文姬),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일로 밤낮 깊이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낭에게 고해 이르기를, “제가 청컨대 공과 더불어 몰래 먼저 저쪽을 탐색하고, 그 이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낭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려고 할 때, 두 여자가 낭을 따라 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 할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드리니 낭이 받아먹었고,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그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낭자들이 고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공이 백석을 물리고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다. 낭자들이 곧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꾀어 유인하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길을 나아가니, 내가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공이 듣고 놀라 쓰러지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골화관(骨火?)에 유숙할 때 백석에게 일러 말하길,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청컨대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져와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러서 백석을 결박하고 그 사정을 물었다. 이르기를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고본(古本)에는 백제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려의 선비이고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것도 보장왕(寶藏王)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르길,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점치던 선비 추남이다[고본에서는 춘남(春男)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역류하는 물[혹은 웅자(雄雌)가 엎치락뒷치락 하는 일이라고 한다]이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아뢰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으니, 그 단서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다’라고 하고는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물어보게 하고 잘못 말하면 중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넣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쥐입니다. 그 목숨은 여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고 하고는 장차 참죄(斬罪)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세하여 말하길, ‘내가 죽은 후에 원컨대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려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목숨이 일곱이었다. 이때 앞서 한 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를 군신에게 말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까닭에 나를 보내어 이러한 모의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김씨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인하여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매년 봄에 온 집안의 사녀(士女)가 그 계곡의 남쪽 시내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마을 숲에 가득하였다. 계곡 입구에 암자를 짓고 인하여 송화방(松花房)이라 이름하였으며, 전하여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