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토기

통일신라토기

[ 統一新羅土器 ]

고신라토기에서 통일신라토기로의 이행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통일신라기는 고신라 고유의 문화와 외래의 당나라 문물이 합쳐지면서 고유한 부분과 새로운 부분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토기만의 특징이 나타난다. 통일신라토기의 특징은 다리에 아주 작은 구멍을 가진 뚜껑없는 굽다리접시(無蓋式高杯)의 등장, 인화문(印花文)토기의 성행, 그리고 유약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신라 후기토기에서 보였던 뚜껑받이가 있는 뚜껑굽다리접시는 아직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통일기 토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른 예는 경주 충효동 돌방무덤(忠孝洞石室墳)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며, 그보다 조금 늦은 예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다. 이 안압지는 674년에 완공되었으므로, 이 인공연못에서 발굴된 토기들의 상한연대는 바로 이 해가 되는 것이다. 또한 안압지는 8-9세기에 걸쳐 실제 사용되었던 일상용토기의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주로 인화문이 날인된 주발형토기와 화병형의 토기가 많이 나왔고, 벼루나 장군, 약탕관모양의 그릇 등 다양한 모양의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한편 울릉도 천부동(天府洞) 고분에서는 목이 긴 병과 몸의 한쪽이 납작해진 특이한 모양의 토기들이 나왔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인 9-10세기의 토기들로 여겨진다.

고신라토기는 4세기 무렵부터 통일이전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그 성격을 여러 번 바꾸면서 후대에 이르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의미에서의 신라토기의 전통은 실제로는 통일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그 명맥을 잃고 있다. 그러나 그 전통은 통일신라기의 일상용토기를 통하여 고려시대로 넘어 갔고, 또 형태와 질은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의 옹기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新羅土器(金元龍, 悅話堂, 1981년)
  • 韓國의 美5-土器(韓炳三, 中央日報社,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