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고인돌

제주도 고인돌

[ 濟州島 支石墓 ]

지역 제주

제주도 전역에 있는 고인돌로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원삼국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한반도 고인돌(支石墓)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한다.

그 분포상태를 살필 때, 전체적으로 보아 제주도 고인돌은 제주시와 북제주군 애월읍(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그리고 남제주군 대정읍(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서귀포시 서쪽, 그리고 남원읍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대체로 제주도 북부와 북서부에 가장 집중되어 있고, 그 다음이 서남부 그리고 동남부에 분포한다. 제주도 동북부와 동부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대의 생활여건 중 특히 농경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고인돌이 처음 본격적으로 조사된 것은 1959년으로 제주도종합학술조사반의 김철준(金哲埈)이 제주시 한천변의 고인돌 총 20여 기 중 오라동 3기, 용담동 3기, 외도천변의 외도동 1기를 조사 보고하였다. 1969년 최몽룡(崔夢龍)은 곽지리에서 4기를 조사하여 보고하였으며, 1973년 송석범(宋錫範)은 제주도 전역에 총 55기의 고인돌 숫자를 확인하고, 그 중 제주시의 용담동, 오라동 12기, 삼양동 4기와 북제주군 광령리 7기, 귀일리 4기 등의 고인돌 위치를 보고하였다. 1984년에 이청규(李淸圭)가 외도천변의 광령리와 외도동 구역을 답사하여 총 24기의 고인돌을 조사하고 이를 보고하였다. 최근에 강창화(康昌和)는 제주시에 26기, 북제주군 29기, 남제주군 84기로서 총 139기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대부분의 고인돌은 지형상으로 완만한 평탄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서북한과 중국 동북지방에서 탁자식(北方式)고인돌이 구릉상의 정상부에 있거나, 기반식(南方式)고인돌이 하천변의 완만한 대지상에 군집해 있는 한반도의 양상하고는 차이가 난다. 고인돌의 군집상태를 볼 때 제주도 고인돌은 수십 기 이상 밀집되어 있는 경우는 없고, 한구역에 10기 미만이 분포하고 그것도 고인돌 상호 간에 수 십 내지 수백 미터 거리를 두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구역에 5기 이상 분포한 주요 유적으로 제주시 한천변의 용담동·오라동, 외도천변의 외도동·광령리, 그리고 대정읍 동일리와 가파도의 예가 있다.

우선 제주시 한천(漢川)변 고인돌의 경우 1964년 송석범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천을 따라 그 서쪽 하류쪽으로 3기, 중류지역의 먹돌생이 부근 11기, 그리고 상류지역으로 올라가 오라동(吾羅洞) 지점에 5기로 모두 19기가 확인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확인된 고인돌은 오라동에 1기, 중류 부근에 3기, 하류부근에 2기, 그리고 먹돌생이 지점에 있는 1기와 공항입구에 옮겨진 2기를 포함하여 모두 9기 뿐이다.

외도천(外都川)변 고인돌은 외도천변의 서쪽의 완만한 구릉 대지 위에 있다. 해안으로부터 거리가 2㎞ 이상 떨어져 있고 주변에 광범위한 유물산포지가 분포되어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주시 외도동(外都洞)과 애월읍(涯月邑) 광령리(光令里)로 나뉜다. 남제주군 대정읍 동일리(東日里) 고인돌군 유적은 해발 100m 되는 봉우리 남쪽의 30m 내외의 평탄대지에 7기가 직경 100m 범위 내에 있으며, 상호 가장 가까운 거리가 10m 정도이다.

그밖에 일정 구역에 2기 이상이 확인된 곳으로 제주시 삼양동(三陽洞), 애월읍 곽지리(郭支里)·귀일리(貴日里), 안덕면 창천리(蒼川里) 등이 있다. 또한 1기씩 단독으로 발견된 고인돌로 제주시 도련동(道蓮洞)·도남동(道南洞), 한림읍 옹포리(翁浦里)와 우도(牛島) 등에 있다. 한편 제주도 본섬 최남단에서 해안 직선거리 4㎞ 떨어진 가파도(加波島) 남쪽 하동(下洞)에 선돌(立石) 1기와 함께 고인돌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수 기 있으나, 대부분의 고인돌 덮개돌(上石)이 표토에 묻히고, 고임돌(支石)은 확인되지 않았다.

제주도 고인돌을 외형상의 형태, 특히 고임돌의 고임상태와 매장시설의 위치, 그리고 덮개돌의 형태를 기준으로 제주도 고인돌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의 6가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형식 매장부 위치 지석 형태 상석 형태 비고

제1형식

지하

없음

판돌형, 바둑판형

개석식

제2형식

지하

괴석형

바둑판형

기반식

제3형식

반지상

괴석형

아치형

기반식

제4형식

반지상

괴석형, 이중지석

부정형, 바둑판형

기반식

제5형식

반지상

괴석과 판돌

부정형, 바둑판형

위석식

제6형식

지상

판돌

부정형, 바둑판형

위석식

우선 제1형식은 고임돌 없이 덮개돌이 지표에 맞닿는 개석식(無支石式)으로 외도동(外都洞) 1호 고인돌이 이에 속한다. 대체로 장방형(長方形)으로 암반을 파내어 매장부(埋葬部)를 마련하고, 적석(積石)을 하였다. 지표에 드러난 것만으로 볼 때 광령리(光令里) 11호, 삼양동(三陽洞) 2호 고인돌이 이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축조기법상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제2형식에 속하는 고인돌은 오라동 1·2호, 용담동 6·7호, 삼양동 1·3호, 외도동 3호, 광령리 3·12호, 귀일리 2·3호, 동일리 1·2·3·4·5호, 곽지리1·2·3호, 옹포리, 하모리, 신예2리, 창천리 고인돌 등으로 여섯 형식 중 가장 많다. 전형적인 바둑판식과 같이 두께가 일정한 덮개돌 귀퉁이에 고임돌을 제대로 고인 예는 드물다. 고임돌은 남방식에 비해 크기도 작고, 대부분이 제대로 다듬지 않은 깬돌(割石)이다. 그 숫자는 2~3개부터 많게 8~9개가 고여 있다. 제3형식은 덮개돌이 아치모양을 이루는 특이한 형태로서 외도동 3·6·7호, 광령리 6호 고인돌이 이에 속한다.

외도천변에만 확인되고, 아직 제주도 다른 지점에서는 확인된 예가 없다. 덮개돌 한쪽이 들려 하부 매장부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좌우와 들리지 않은 뒤쪽에 고임돌이 고인 형식이다. 광령리 6호의 경우 들린 입구 쪽으로 잡석이 메꿔져 있었다. 제4형식은 고임돌이 2중으로 고인 형식으로, 뚜렷한 매장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귀일리 1호, 색달동 고인돌, 신도리 3호 예가 획인된다. 귀일리는 비탈면을 이용하여 한쪽을 깬돌로 받쳤다.

제5형식은 고임돌로 잘다듬어진 판돌과 깬돌이 같이 있는 고인돌로 외도동 2호, 광령리 2·5·13호, 일과 2리(日果 2里), 신산리(新山里), 창천리(蒼川里)고인돌이 이에 속한다. 대체로 비탈면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깬돌과 괴석을 그리고, 낮은 곳에 판돌을 고인 형식이다. 매장부는 거의 지상에 드러나 있다. 제6형식은 덮개돌 가장자리를 따라 5개 이상 심지어는 13매 이상의 판돌모양 고임돌로 고인 것으로 경사면에 축조된 것과 평탄면에 축조된 것이 있다. 전자에는 용담동 1·5호와 광령리 15호, 후자에는 용담동 2·3호와 광령리 4호 고인돌이 해당한다.

한편 최근에는 제주도 고인돌 중에서 남한지방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지하매장시설 주위로 돌아가면서 적석(積石)을 하고 묘역을 시설한 예가 확인된 바 있다. 제주도에서 고인돌 축조의 상한은 한반도에서처럼 청동기문화이긴 하나, 연대상으로 청동기시대 후기 단계인 B.C. 4세기 이후까지 내려 올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제주도에 중기 이전의 청동기시대 단계인 상모리식토기의 유적지가 확인되나, 동 단계에 고인돌을 축조한 증거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른 단계의 제주도 고인돌은 그렇다 할지라도, 앞서 보듯이 여러 고인돌과 주변의 유물산포지에서 곽지리식토기가 공반되므로 그 대부분은 곽지리식토기 시기에 속하는 B.C. 3~1세기 경의 것임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 濟州島 考古學 연구(李淸圭, 學硏文化社, 1995년)
  • 濟州島 遺跡(濟州大學校博物館, 1986년)
  • 濟州道 支石墓 硏究 1-北濟州郡 涯月邑 光令里 支石墓群(李淸圭, 耽羅文化, 1984년)
  • 濟州道 고인돌 小考(宋錫範, 濟州道 13, 1964년)
  • 濟州道 支石墓 調査報告(김철준, 서울대論文集 9, 195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