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민족주의

아랍민족주의

[ Arab Nationalism ]

요약 19세기 말부터 등장한 아랍지역의 정치사조로 아랍인들이 단일한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하나의 정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랍인들이 단일한 정치적 공동체 혹은 국가를 구성하고, 하나의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아랍인'이란 아랍 지도자 회의의 결정에 의하면 '아랍 국가에 살고, 아랍어를 사용하며, 아랍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아랍인이라 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랍민족주의는 아랍인의 통합을 주창한다는 점에서 범아랍주의(Pan-Arabism)와 관련되어 있으나, 아랍 민족의 통합 뿐만 아니라 각각의 아랍 국가의 독립, 국민 통합, 중동에 대한 서구의 개입 차단 등에서 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아랍 세계의 통합을 주창하는 범아랍주의와는 다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아랍민족주의적 정치 사조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당시 아랍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으며, 오스만튀르크 정부는 제국 내 다양한 민족의 종교, 언어, 관습 등을 인정하며 자치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튀르크 정부가 근대화 개혁을 거치며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아랍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자치권이 묵살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의 한 방법으로 민족주의적 정향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가 다수 거주하여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열강과 미국계 선교 학교가 세워진 시리아 지역이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선두로 영국, 러시아 등이 세운 기독교계 학교들을 통해 아랍 학생들은 세속화된 서구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이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미국 청교도계 대학인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AUB: American University in Beirut)을 중심으로 아랍어 교육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아랍어의 부흥은 아랍 문화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AUB는 곧 아랍 민족주의 이념의 시작점이자 중심지가 되었으며, 1875년에는 AUB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아랍 민족주의 정당이 세워졌다.

아랍어 교육 확대, 아랍 문화의 부흥, 오스만 제국 내에서의 자치 등을 주창한 초기의 온건한 아랍 민족주의는 청년튀르크당 혁명(1907~1908년)등을 계기로 '튀르크화'를 강요받으며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1913년 아랍의 정치인, 지식인들은 파리에서 제1회 아랍민족회의(Arab Congress)를 개최했으며, 그 취지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의 자치 확대와 지방자치군 양성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군사적·정치적 열세에 몰린 오스만 제국은 아랍 민족주의 세력을 혹독하게 억압했다. 그 결과 형성된 반튀르키예 감정을 타고 아라비아 반도 히자즈 지방을 통치하던 메카 태수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과 연합하여 아랍 반란군을 조직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다. 샤리프 후세인의 차남 파이잘 이븐 압둘라가 이끈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튀르크군를 물리치고 1918년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으며, 시리아 주민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시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오스만 제국을 와해시키고자 아랍 민족주의를 후원했던 영국은 전후 아랍 민족을 배반하고, 프랑스와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아랍 점령지를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설정했다. 영국의 이러한 이중적 행위는 아랍 민족주의가 영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반식민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되는 중요한 계기이자, 오늘날의 시리아 지역이 아랍 민족주의의 중심지가 된 원인이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 기간 중 아랍 민족의 독립과 국가건설을 주창했던 아랍 민족주의자로는 미쉘 아플라끄(Michel Aflaq), 사티 알 후스리(Sati al-Husri), 아민 알 리하니(Amin al-Rihani), 안툰 사다(Antun Saadeh)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아랍 민족주의 운동은 이슬람주의, 지역단위의 민족주의 등과 함께 서구의 식민 통치 하에서 아랍 민족의 독립을 주창했다. 특히 미쉘 아플라끄는 살라흐 알 딘 알 비타르(Salah al-Din al-Bitar), 자키 알 아르수지(Zaki al-Arsuzi)등과 함께 아랍 민족주의 정당인 바아스당(Baath Party)을 창당했으며, 이 정당은 인종적,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아랍 민족의 통일된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 국가들이 독립을 얻은 뒤로 아랍 민족주의는 신생 국가의 통합 기제이자 이스라엘 건국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위임통치가 끝난 뒤에도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고 있던 영국에 맞서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ul Nasser) 대통령 등이 대표적인 현대적 아랍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화의 국유화 뿐만 아니라 아랍 민족주의의 이상인 아랍 세계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Unites Arab Republic: UAR, 1958~1961)의 국명 하에 통합되었으며, 이 연합국에 북예멘도 합류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의 이상은 시리아와 이집트간의 패권 경쟁과 양국간의 경제적 격차, 지리적 요인 등으로 1961년 와해되었다. 아랍 통합의 이상은 1972년 리비아 대통령 무함마르 알 까다피(Muammar al-Qadaafi)에 의해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를 아랍연방(Federation of Arab Republic)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추진되었으나 각국 지도자들의 의견 불일치로 실패했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는 이슬람주의와 함께 여전히 많은 아랍 국가의 통치 이념이자, 아랍 국가간 협력의 이념적 기반이며, 또한 초국적 아랍 정당인 바아스당(Baath Party)을 비롯한 여러 아랍 정당의 설립 목표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