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후율당
[ 沃川 後栗堂 ]
- 요약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옥천 후율당
지정종목 | 충청북도 기념물 |
---|---|
지정일 | 1976년 12월 21일 |
관리단체 | 배천조씨종중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길 42 (도이리) |
시대 | 조선시대 |
종류/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인 조헌(趙憲:1544~1592)이 보은현감(報恩縣監)을 사임하고 옥천(沃川)에 낙향하여 살 때인 1588년(선조 21)에 지은 것이다. 스승인 이이(李珥)를 경모하여 그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자기 호를 이이의 호인 율곡(栗谷)에서 율자를 따서 후율(後栗)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용촌 밤티〔栗峙〕에 당(堂)을 짓고 당의 이름을 후율당(後栗堂)이라고 하였다.
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게서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후율당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하였다.
후율당도 임진왜란 후 퇴락(頹落)되어 가던 것을 1854년(철종 5) 후손들이 옥천군 백양동에 이건(移建)하였다, 1864년(고종 1) 현 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重建)하였다.
당 내에는 1621년(광해군 13)에 판간한 항의신편(抗義新篇) 판목(板木) 125장와 유림시판(儒林詩板) 10장, 선조가 내렸다는 조서(詔書) 1장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경내(境內)에는 금산(錦山)에서 그를 대신하여 죽으려 했던 아들 완기(完基)의 효자각(孝子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