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싸움

금산싸움

[ 錦山─ ]

요약 1592년(선조 25) 7월과 8월 사이에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왜군이 충청남도 금산에서 벌인 전투.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금산 칠백의총 기념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과 8월 2차례에 걸쳐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의병과 왜군이 벌인 전투를 가리킨다. 당시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금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592년 7월 9일 전라좌도 의병장 고경명은 금산에 도착한 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하여 왜군의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왜군의 저항이 완강한데다가 관군이 공격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성공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튿날 다시 벌어진 싸움에서 왜군이 의병의 예봉을 피하고 전의(戰意)를 보이지 않는 관군을 일제히 공격하자 곽영과 관군은 후퇴하였고 덩달아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도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끝까지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아들 인후(因厚)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같은 해 8월 1일 조헌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한 뒤 금산을 점거하고 전라도를 침범하려는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헌이 전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순찰사(巡察使)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 수가 700명으로 줄었다.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한 채 단독으로 700의사(義士)와 함께 금산으로 진격하였고,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8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왜군은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간파하고 군대를 몰래 뒤로 보내어 퇴각할 길을 차단한 뒤 앞뒤로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의병과 승병들은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물리쳤으며, 화살이 다한 뒤에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육박전으로 맞서다가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전원이 순절하였다. 이때 순절한 700의사의 유골을 수습하여 합장한 것이 칠백의총(七百義塚)이다. 이 싸움에서 왜군도 큰 타격을 입어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병력과 함께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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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 내묘

금산 칠백의총 내묘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사적 제105호.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