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이지당

옥천 이지당

[ Ijidang hall, Okcheon , 沃川二止堂 ]

요약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당. 2020년 12월 2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지당

이지당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2020년 12월 28일
소재지 충청북도 옥천군 이백6길 126 (군북면, 문화유산(옥천이지당))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당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12월 28일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당초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친필로 된 ‘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헌은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이의 문인 가운데서도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僧兵)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후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하였다.

각신서당은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시전(詩傳)》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후 퇴락된 것을 1901년(광무 5)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서당 건물은 목조 6칸의 강당과 누각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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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이지당 충북 옥천군 이백리에 있는 조선시대 서당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충청북도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으로 처음에는 각신서당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의 친필로 된 ‘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조선후기에 이지당이라고 고쳐 불렀다. 서당 건물은 이백리 서화천변 언덕에 위치하며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1칸이며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로 되어 있고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어졌다. 강당 건물 우측 끝에는 마루누정을 설치했고 오른쪽 끝은 누정과 맞닿아 있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