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흥사지

부여 왕흥사지

[ Wangheungsa Temple Site, Buyeo , 扶餘 王興寺址 ]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왕흥사의 옛터. 2001년 2월 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부여 왕흥사지

부여 왕흥사지

지정종목 사적
지정일 2001년 2월 5일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번지
시대 백제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크기 면적 200,170㎡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2월 5일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백제의 국찰(國刹) 왕흥사가 있던 곳이다. 부여 부소산성낙화암, 고란사, 그리고 부여 구드래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왕안리 마을 울성산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흥사는 600년(무왕 1)부터 634년(무왕 35)에 걸쳐 지은 백제의 대사찰이며, 당시 법왕은 30여 명을 출가시켰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고 새겨 있어, 실제 창건연도가 577년(위덕 24)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 멸망 뒤 이 절에 남아 있던 백제 병사 700여 명이 신라의 태종무열왕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왕흥사는 부여에 있는 백제의 사찰 중에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 절이 물가에 있고 단청이나 장식이 크고 화려하며, 왕이 항상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불을 올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절이 산기슭에 있고 물가에 접해 있으며 꽃과 나무가 고와 사철 내내 아름답다. 왕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 그 풍경을 감상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터에서는 ‘왕흥(王興)’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토기 조각을 비롯한 백제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절이 있는 마을이 예로부터 ‘왕은리’라고 불린 점, 입지 조건이 옛 규암나루터 건너편에 있다는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는 점에서 이곳이 왕흥사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강당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맨 위쪽 건물 대지에는 네모난 주춧돌과 기단석 일부가 남아 있다. 금당(金堂)과 목탑(木塔)이 있던 곳으로 보이는 대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는데, 이 민가 뜰과 뒤쪽에 당시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부근의 농경지에 ‘쇠대박이’라고 부르는 논이 있으며, 쇠로 만든 철당간(鐵幢竿)이 있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보호면적은 20만 170㎡이며 임채욱 등이 소유하고 있다.

참조항목

규암면, 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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