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척화비

구미 척화비

[ 龜尾 斥和碑 ]

요약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구미 척화비

구미 척화비

지정종목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지정일 1985년 8월 5일
관리단체 구미시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 산52-1번지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크기 가로 1.75m, 세로 1.86m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대원군 척화비라고도 한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이후 쇄국의 의지를 다지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온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서울 종로와 전국의 주요 도로변에 척화비를 세웠다.

구미 척화비는 1871년(고종 8)에 세워졌다. 높이 1.75m, 너비 1.86m로, 전국에서 유일하게도 자연석을 쪼아 새겼다. 구미 3공업단지에서 2공업단지로 넘어가는 구포동 솔뫼고개의 길가에 있다. 지금은 바위가 돌아앉아 있는데 비를 세울 무렵에는 길이 바위 앞으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칠곡·가산·왜관 지방의 사람들이 한양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그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의 책략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었다. 그러자 각국과의 통상이 이루어지면서 이 비석들도 대원군이 세운 지 12년 만에 고종의 명으로 거의 철거되었다.

다른 곳에 세워진 척화비는 거의 부수거나 땅에 묻었는데 이 비는 다듬어 세운 비석이 아니고 무거운 자연석이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일제 때 한 석공이 이 비석 바위를 다듬어 상석(床石)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민들의 만류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비문(碑文)에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라고 씌어 있다. 앞의 12자는 9.5㎝×9.5cm의 큰 글자로 새겨졌고, 나머지는 4㎝×5.5cm로 새겨져 있다.

높이 1.75m, 너비 1.86m이다.

역참조항목

양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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