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생가

용아생가

[ 龍兒生家 ]

요약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 1986년 2월 7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용아생가

용아생가

지정종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지정일 1986년 2월 7일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 (소촌동)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탄생지

1986년 2월 7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박용철은 이곳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개화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이 집은 용아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하나 건립 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막돌바른층쌓기를 한 2자 높이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주두 위에 납도리를 올려 가구하였으며 5량 구조로 되어 있다. 맨 왼쪽은 부엌으로 전면에는 부엌방을 두었으며, 중앙 2칸은 방으로 네짝문을 달았고 나머지 2칸은 2짝 여닫이의 정자(井字) 살문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들쇠를 걸어서 들어 열 수 있는 들어열개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겹처마이다. 전면에는 두리기둥(원형기둥)을 사용하였으나 측면과 내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랑채도 5칸집으로 우측으로부터 부엌, 방, 방, 마루의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인 맞배지붕집이며 서재는 원래 초가집이던 것을 시멘트 기와로 이었다. 행랑채는 4칸집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용아 박용철의 생가는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 현대문학 기수의 한 사람으로 초기 시단을 빛낸 용아를 기리기 위하여 그 생가 일단을 지방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박용철은 1904년 이곳에서 태어나 광주 공립보통학교와 서울 배재고등학교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쿄 아오야먀[靑山]학원에서 수학중 시인 김영랑과 사귀게 되었다. 졸업 후 다시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수석으로 입학, 수학하고 귀향하여 문학활동에 전념하였다. 도쿄 외국어대학교 독문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교시절부터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고 1922년 도쿄 아오야마학원 4학년에 편입, 1923년 9월에 귀국하여 당시 강진에 있던 김영랑과 왕래하면서 시 창작에 전념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운 한국 유학생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김영랑·정지용·정인보·변영로·김윤식 등과 문학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영랑·정지용 등과 1930년에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시문학에 샛별처럼 등단하였다. 이 무렵의 조선 문단은 프로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온 때였으나 용아는 순수시 운동에 몸을 바쳐 1930년대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시문학》 이후 《문예월간》 《문학》 등을 발간하였고,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하였으며, 해외 시의 이론을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8년 5월 12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참조항목

광산구, 박용철

역참조항목

어룡동, 소촌동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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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용아생가 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시인 용아 박용철의 생가로 그는 이곳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개화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는 활동을 하였다. 생가의 건립 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박용철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초가로 지어진 집이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사랑채도 5칸집으로 지어졌으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인 맞배지붕집이다. 행랑채는 4칸집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는 문간채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