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회화

프랑스의 회화

카누를 젓는 사람과 점심식사

카누를 젓는 사람과 점심식사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 회화의 역사는 중세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회화의 본격적인 기초는 한편으로 비잔틴 미술,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로부터의 고대 화풍을 동시에 섭취하면서도 고대 고전양식에 기울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고전적 그리스도교 회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 회화는 고대풍(古代風)의 인간상을 인간감정이나 사상의 전달자로서 종교적 설화나 교조를 그 속에 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인간, 기타 자연의 모습에 대한 관심을 높임과 아울러 회화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회화는 거의 대부분 그림들이 ‘사본(寫本:miniature)’에 국한되었으며, 중세 말기에 와서 그 화풍은 고딕 말기의 국제우아양식(style international courtois)이 되었다.

프랑스 회화는 15세기까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푸케의 회화는 이 양식의 마지막 개화(開化)라고 할 수 있다. 중세적인 양식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근세 프랑스 회화가 정립된 시기는 프랑수아 1세와 그 후계자들에 의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때를 같이한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마니에리슴(maniérisme) 화가 프리마티치오와 로소를 초빙하여 퐁텐블로성을 장식하게 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파가 퐁텐블로파(Ecole de Fontainebleau)이다.

이 파의 화가들은 그들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이교적(異敎的)인 주제나 관능적인 주제에 심취하였으며,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미와는 또다른 감각적이고도 우아한 양식을 창출해냈다. 17세기의 회화는 우선 퐁텐블로파의 관능적이고 이교적인 마니에리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나며, G.de 라투르, P.de 샹페뉴, 루이 르냉 등 일군의 ‘현실의 화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고대 숭상의 기운이 풍미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성과를 동화시키면서 프랑스 고전회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대표적인 화가가 주로 로마에서 활동한 푸생과 C.로랭으로서, 그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찬연히 빛나고 있다. 이 두 거장 외에도 르 쉬외르, 르 브룅, 미냐르 등이 배출되어 왕후(王侯)의 궁전 ·저택을 장식하는 대작의 신화화(神話畵) ·종교화 ·역사화 ·초상화 등을 그려 역시 고전적 회화양식의 달성에 힘썼다.

17세기는 유럽 전역에 걸쳐 바로크 양식이 팽배한 시대였으나, 유독 프랑스만은 1648년에 창설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중심이 되어 보다 합리적인 미술신조를 추구하면서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죽음과 함께 17세기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교조적인 고전주의 회화신조에 대한 반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에 이미 와토의 ‘사랑의 향연화(響宴畵)’의 향기 높은 시정(詩情)에 의해 감각적인 환락을 구가하는 로코코 회화 시대의 막이 열린다. 부셰는 그 향락적인 감각성에다 귀족취미를 가미하여 신화적인 주제의 나체 여신군상들을 다루었고, 프라고나르는 자유분방한 필치로 감미로운 정경을 그려냈다.

이와 함께 서민의 일상적 생활 정경과 취미를 그대로 회화에 반영하는 작품도 나타났으며, 그 대표적인 화가 샤르댕은 깊은 관조(觀照)와 애정으로 격조 높은 정물화와 실내화(室內畵) 등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제정시대를 맞이하면서 회화도 크게 전환하였다. 신고전주의의 탄생이 그것이다. 로마에서 고대 고전의 풍토 속에서 자란 L.다비드는 고대 로마의 영웅주의를 칭송한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함께 귀국하여 명실공히 신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다비드는 로코코 회화의 무절제를 절대적으로 배격하고 고대 고전의 규범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혁명 시대에는 그 역사적 정경을 화폭에 옮겼고, 제정시대에는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로서 황제의 업적을 대화면에 담았다.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회화는 고대 조각을 본보기로 삼아 데생과 형태 위주의 차가운 형식주의에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었으며 그것이 결국은 아카데미즘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다비드는 투철한 사실주의 정신에 의해 그것을 극복하였다. 다비드의 문하생으로서 신고전주의의 대를 이은 앵그르는 보다 유연한 선의 율동과 색채의 조화를 통해 순수한 조형미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같은 다비드의 문하생 가운데 A.J.그로는 전쟁화(戰爭畵)와 같은 극적인 소재를 강렬한 색채 효과와 함께 다루어 다음 세대의 낭만주의를 예고하였다.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는 제리코, 들라크루아의 출현으로 개화한다. 제리코의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1819)은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주제부터가 극적이거니와 그것을 격한 명암의 대비 아래 동세(動勢)에 넘치는 구도로 화폭에 담고 있다. 아깝게도 요절한 제리코의 뒤를 이어 낭만주의 회화를 대성시킨 사람이 들라크루아이다. 그는 풍부한 상상력과 고도의 교양으로 중세와 동방(東方)세계, 또는 문학작품에서 영감의 원천을 즐겨 찾았고, 데생이나 형태보다는 색채 자체의 표현력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였다.

여기에서 신고전주의 대 낭만주의와의 숙명적인 대치는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실질적인 봉화라 할 수 있는 《키오스섬의 학살》은 고전파에 의해 ‘회화의 학살’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고, 그 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낭만주의 정신은 일종의 고전적 경지를 느끼게 하는 원숙성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낭만주의적 성향은 다시 일련의 풍경화로 이어졌다. 1830년대부터 파리 근교 바르비종 마을에 일군의 풍경화가들이 정착하여 그들은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를 형성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화가는 T.루소, 뒤프레, 도비니, 코로, 밀레 등이며, 특히 코로의 풍경화는 사실주의를 반영하면서도 그 풍경을 낭만적인 시정의 세계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밀레는 가난한 농민의 전원생활을 경건한 종교적 감정으로 묘출하였다. 한편, 도미에는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석판희화(石版戱畵)와 함께 현실에 대한 냉철한 통찰과 예리한 사실적 묘사에 의해 이미 사실주의의 기틀을 잡아놓았다.

그리고 고전주의적 이상과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다같이 거부하고, 또 이에 도전한 화가가 쿠르베였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주의는 “자기가 사는 시대의 풍습 ·풍속 ·사상을 표현하는 예술,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사실주의는 보다 선명한 색도(色度)를 화면에 도입한 마네로 이어지고 다시 인상주의로 전개된다.

모네, 피사로, 시슬레, 르누아르, 세잔 등에 의해 대표되는 인상파들 중에서 특히 모네는 날카로운 색채 감각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순수한 광선의 현상으로 포착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쿠르베까지 지켜져 왔던 자연의 물질적 실재성이 사라지고 르네상스 이래의 자연관이 마침내 붕괴되었다. 사물 고유의 물체감마저 증발시키는 광선과 색채의 신기루로부터 회화에서의 견고한 형태와 구도를 되찾게 한 화가가 세잔이었다. 그는 인상파의 시각적 감각주의에 불만을 품고 자연을 자신의 엄격한 조형의지로 통어(統御)하였다. 즉, 자연에서 가장 본질적인 구성의 골격을 추출해내고 그것을 하나의 엄연한 조형질서 속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고갱은 자연을 거의 무시한 채 회화를 평면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큼직한 윤곽선과 널찍한 순색의 색면으로, 대담한 회화의 평면화를 이룩하였다. 이들과 때를 같이 하여 신인상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쇠라는 인상파의 직관적인 광선 ·색채 묘출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체계화시키고 색채의 선명도를 최대한으로 살림과 동시에 인상주의에서 잃었던 형태를 색조의 대비를 통해 확연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20세기 프랑스 회화의 첫 혁신은 야수주의(野獸主義)에서 비롯되나 이 회화운동이 고갱, 쇠라 그리고 고흐의 유산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 야수파 중에서도 출중한 존재는 마티스이다. 그는 대담한 형태의 단순화와 강렬한 순색(純色)의 평면적인 채색으로 회화를 선의 아라베스크와 큼직한 색면구도로 환원시켜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예고하였다. 이 원색적인 야수파의 감각주의에 이어 입체주의(큐비즘)는 강한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피카소와 브라크 등에 의해 추진된 이 혁신적인 조형운동은 대상의 형태를 기하학적인 단위로 해체 ·분해시켜 그것을 다시 임의의 방식으로 재구성시킴으로써 회화를 대상의 재현이라는 오랜 통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약 10여 년 동안 프랑스 미술은 야수주의나 입체주의의 활기차고 다양한 조형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전쟁 후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중요한 미술운동은 초현실주의(surrealism)로 그친다. 이 운동은 그때까지 회화의 중심 과제였던 조형성의 문제보다는 무의식이라고 하는 인간활동의 미지의 영역에 눈을 돌려 현대회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와 병행하여 순수조형의 문제도 계속 추구되어, 1932년 ‘추상-창조(abstraction-création)’그룹이 결성되면서 뒤늦게나마(독일 ·네덜란드 ·소련에서는 이미 1910년대에 추상회화가 등장하였다) 프랑스에도 추상의 물결이 파급되었다.

프랑스 추상회화의 특징은 일체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점이며 R.들로네, J.비용이 그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회화도 마네시에, 바젠, 에스테브 등이 역시 입체주의적 조형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의 추상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러나 전후의 프랑스 추상회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앵포르멜(informel:非定形) 운동이다. 일체의 조형적인 규격이나 문법을 완전히 타파하고 본능적인 몸짓의 흔적과 대담한 마티에르를 회화에 도입한 이 과격한 추상회화운동은 50년대의 전유럽을 휩쓸다시피 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로는 포트리에, 뒤뷔페, 아르퉁, 술라주, 마티외 등이 있다.

앵포르멜 이후 프랑스 미술은 60년대 초에 신현실주의(Nouveau Réalisme)의 이름 아래 ‘현실의직접적 제시’라는 모토를 내세워 집단적인 미술운동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의 미술은 매우 다변화된 현상을 띠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