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역사

티베트 역사

검은모자의 무용수

검은모자의 무용수

티베트에서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의 각종 석기(石器), 도기(陶器), 골기(骨器), 장식품, 종자(種子), 두골(頭骨)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니양허(尼洋河) 기슭에서 발견된 인골(人骨)은 유인원이 아닌 현세 인류의 것이었고, 니츠(尼池) 인골은 대략 4000년 전 것으로 신석기 시대 혹은 철기와 석기를 병용하던 시대의 것이다.

6세기에 이르러, 장족 부락들은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락연맹을 형성했다. 7세기 당(唐)나라가 성립하자 이와 함께 티베트 산난시 야롱(雅隆)의 부족이 차츰 각지의 부족을 정복하여 사상 최초로 칭장고원의 각 부족을 통일한 토번왕조(吐蕃王朝)를 세웠다. 토번 왕(王) 송첸감포는 641년 당 태종(太宗)이 보낸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을 하고, 당과 토번 사이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당과 토번은 8차례 회맹(會盟)을 맺었는데, 지금도 라싸 조캉사원 정문 앞에는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가 세워져 있다. 869년 시작된 민중의 폭동이 반란군을 형성하여 왕들의 무덤을 약탈하고 왕실과 귀족들을 살해하면서 877년 토번은 멸망하고 1239년까지 티베트는 통일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분열 시대가 계속된다.

1253년 원(元) 헌종(憲宗) 몽케칸(Mongke Khan)은 군대를 보내서, 티베트 전역을 장악하고 선위사(宣慰使)를 두었다. 또 세조(世祖) 쿠빌라이티베트불교의 고승 파스파를 중용하여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티베트에서는 정교합일적(政敎合一的) 지배체제가 확립되어, 명(明), 청(淸) 시대에는 중국의 종주권 밑에 티베트불교의 지배자가 정치적 지배권도 함께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71년 몽골 쿠빌라이가 원(元)으로 국호를 정하고 티베트에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티베트의 중부지역과 서부지역 등이 원 제국의 일부분으로 편입된다. 원은 티베트에서 민호(民戶)를 조사하고, 역참(驛站)을 설치하며, 세금을 걷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관리를 임명하였다. 한편, 티베트불교도 황실을 중심으로 원 제국 전역에 차츰 확산되기 시작했다.

청대 초기에는 티베트불교 겔룩파(Gelug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달라이라마(Dalai Lama)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 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Panchen Lama)가 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또 건륭제(乾隆帝)는 달라이라마의 권력기관으로 '가샤(티베트 정부조직)'를 만들었고, 구르카족이 침략하자 군대를 파견, 이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는 영국이, 그 뒤를 이어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제국 열강은 티베트 상류층의 일부와 결합하여, 티베트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려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신해혁명 후 국민당 정부는 1930년부터 관리를 파견하였고 1934년에는 라싸에 몽장위원회(蒙藏委員會 몽골과 티베트 관련 사무를 관할하는 위원회) 주(駐) 티베트 사무소를 설치, 중국의 종주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 이듬해 10월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달라이라마는 국제연합군의 개입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실패한 끝에 1951년 5월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항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라싸에 중국의 민간 주재 기관과 군사사령부를 설치했다.

그 후 군대와 민간인의 계속된 유입으로 인한 자원 부담과 캄(Kham) 지역 티베트인에 대한 박해를 계기로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제14대 달라이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이 사건과 함께 티베트에서는 사유재산이 몰수되고 사원과 귀족의 영향 아래 있던 티베트의 사회경제구조는 농촌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집단생산 체제로 바뀌었다.

중국은 자치를 유지한다는 정책을 보여주기 위하여 중국의 새 판첸라마를 임시 행정부의 의장으로 앉히고 수많은 불교 사찰 가운데 전시효과를 노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승려들의 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그 뒤 티베트인의 여행 억제, 농업생산의 독려, 적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티베트인에 대한 강제노동 등 엄격한 제재가 지속되었고,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이후 1961, 1962년의 기근을 계기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많은 피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고 게릴라전이 계속됨으로써 판첸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1965년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하고 당시까지 행정구역의 하나였던 창두 지구를 티베트자치구에 편입시켰다.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중국의 통치가 완화되었다. 1989년 14대 달라이라마가 비폭력적인 티베트 독립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