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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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자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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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원시적 형태는 로마시대의 《악타 디우르나 Acta Diurna》》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원로원의 의사록이었던 《악타 세나투스 Acta Senatus》와 평민원의 의회상황 등의 발표물을 총칭하는 것이다. 《악타 디우르나》는 집권자가 자신의 행정방침과 포고령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발간된 것이고, 《악타 세나투스》는 선언문, 포고문, 원로원의 정치적 결정사항 등을 알리기 위해 별도로 발간되었다. 《악타 디우르나》에서는 검투경기, 주술, 저명인사의 경조사, 공직 인사 등의 소식이 실리는 등 내용면에서 근대적 신문의 형태를 띠었지만, 집권자들이 자의로 선택한 뉴스만을 실은 관보의 일종이었다. 

중국에서도 8세기경에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저보(邸報)》라 부른 정부 발표물의 보도기관이 있었고, 송(宋)나라 후기에는 《조보(朝報)》라 부른 관보를 발행하였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제호와 형식이 변하고, 인쇄방식도 필사본에서 17세기부터 목판본으로 바뀌었지만 《저보》는 1,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청대(淸代)에 발간된 《경보(京報)》는 그 후신이라 할 수 있다.

로마시대 이후 귀족들 사이에는 뉴스의 교환이 성행하여 서한신문이 나오게 되었고, 독일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다. 13, 14세기부터 15, 16세기에 걸쳐서 르네상스·종교개혁·튀르키예군(軍)의 유럽 침입, 신대륙 발견 등의 여러 사건이 일어나 뉴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제후와 도시, 대학 등에서도 뉴스를 수집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또한 상인들도 상업상의 필요에 따라 각지의 뉴스를 수집하였다. 유명한 것으로는 독일 푸거가(Fugger 家)의 〈푸거 차이퉁겐 Fugger Zeitungen〉이 있다. 서한신문이 발전하여 규칙적인 필사신문(筆寫新聞)도 발행하였는데, 인쇄술이 발달하자 서한신문이나 필사신문 중에서 흥미로운 내용이나 상인·학자·학생·농노·여행자 들에게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모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부정기 인쇄신문을 ‘플루크블라트(Flug-blatt)’라고 부른다. 그후 17세기로 들어서면서 근대신문으로서의 새로운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1609년 독일에서 세계 최초의 주간신문인 《렐라치온 Relation》과 《아비소 Aviso》가 나오고, 이어서 네덜란드(1618년경)·영국(1622)·프랑스(1631) 등에서도 주간신문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초기 신문의 내용은 외국 뉴스를 주로 다룬 것으로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17세기에 주목되는 나라는 영국이었는데, 당시 영국의 신문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누어져 분쟁중이었으므로, 이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J.밀턴이 1644년 〈아레오파기티카 Areopagitica〉를 발표하여, ‘사상의 공개시장’ 또는 ‘자동조정 작용(the self-righting process)’과 같은 현대적 언론자유의 개념을 개척하였다. 이후 1688년의 명예혁명을 거쳐 1695년에는 특허검열법이 폐지됨으로써 영국 최초로 언론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1660년에는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인 《라이프치거 차이퉁겐 Leipziger Zeitungen》이 독일에서 발간되었으며, 18세기로 들어서면서 각국에서 일간지가 발행되고, 근대신문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영국 최초의 일간지 《데일리 쿠란트 Daily Courant》가 창간된 것은 1702년이었고, 《타임스 The Times》의 전신인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 Daily Universal Register》가 1785년에 창간되었다. 미국에서는 1690년 보스턴에서 《퍼블릭 오커런시스 The Public Occurrences》가 최초로 발행되었으나 제1호만 내고 발행이 중지되었으므로, 1704년에 창간된 주간지 《보스턴 뉴스 레터 Boston News Letter》를 최초의 발행지로 볼 수 있다. 미국 최초의 일간신문은 1783년에 창간된 《펜실베이니아 이브닝 포스트》이고, 프랑스 최초의 일간신문은 1777년에 창간된 《주르날 드 파리 Le Journal de Paris》이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영국·프랑스에서 신문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는데, 그 원인은 교육의 보급과 문자 해독력의 향상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화의 선구가 된 신문들은 프랑스 지라르댕(Girardin)의 《라 프레스 La Presse》(1836), 미국 벤저민 데이의 《뉴욕 선》(1833), 영국은 인지세(印紙稅)가 폐지(1860)된 후에 나온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이들 대중신문의 출현은 신문의 기업화와 통속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심해서 J.퓰리처의 《뉴욕 월드 New York World》, W.R.허스트의 《저널 Journal》이 발행되자 이들은 황색신문(yellow journalism)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미국과는 달리 대중 염가신문이 발행되었으나 그 내용이 저속화되지는 않았다. 독일은 원래 신문의 선진국이었으나 언론자유의 보장이 늦어서 신문의 대중화도 1880년대에서야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일·프랑스의 신문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당적 색채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당파신문의 형태를 벗어나 보도신문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전후부터였다.

일본의 초기신문은 1862년 막부(幕府)의 양서조소(洋書調所)가 발행한 관판(官板) 《바다비아 신문》이다. 그밖에도 막부 말기에 발행된 신문들은 외국신문 번역 중심의 해외뉴스가 대부분이었다. 1868년에는 본격적인 신문이 각지에서 나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추가이신문[中外新聞]》이 있다. 1871년에는 일본 최초의 일간지인 《요코하마 마이니치신문[橫濱每日新聞]》이 창간된 데 이어, 1872년 대표적 신문 《도쿄 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현 每日新聞)이 창간되었고, 이어 여성과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소신문(小新聞)’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소신문으로는 1874년에 창간된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1879년 오사카에서 창간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이 이러한 계통의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20세기 초부터 신문의 기업화와 경영의 합리화가 시작되어 이때부터 신문의 체인(chain)화, 그룹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통신망의 발달과 함께 뉴스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세계적인 통신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은 각국 신문의 세력판도와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신문의 보도기능은 크게 향상되었다. 한편, 20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 사회와는 전연 다른 성격을 가진 신문들이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소련에서는 국민에 대한 사상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여 모든 신문을 당과 정부의 기관지로 만들었고, 그 이후에 출현한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도 모두 신문을 당과 정부에서 주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신문이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표방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 국가의 신문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선진국의 언론기업들은 합병과 집중화를 통해 대형화를 추구하였고, 그 결과 각 나라의 국내시장을 뛰어넘는 국제경쟁이 치열해졌다. 미국의 경우 1981년까지는 20개의 주요 출판·잡지 그룹이 있었으나 1988년에는 3개의 대언론 기업에 집중되었다. 《타임》잡지가 영화사인 워너(Warner)를 합병하여 세계 최대의 타임-워너미디어사로 확장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유럽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데 《데일리미러》를 발행하던 영국의 미러 그룹은 1999년에 트리니티 신문사와 합병하여 영국 최대 규모의 언론매체인 트리니티미러가 되었다. 또한 2000년 4월에는 스페인 최대 언론재벌 그루포 프리사가 산틸라나 출판사와 마테우 인쇄회사와 합병한 바 있다. 

세계의 신문시장에서 일간지는 1950년 이래 계속 감소 추세로, 지난 50년 사이 미국의 경우 280여 개의 일간신문이 폐간된 반면, 일요신문은 같은 기간 동안 350여 개 신문사가 새로 생기거나 기존의 신문사가 일요판을 신설했다. 2000년 기준 각국이 발행하는 신문 수는 러시아가 2,600여 개로 선두였으며, 그 뒤를 미국이 1,470여 개, 중국 810여 개, 독일 380여 개, 일본 110여 개, 영국 100여 개, 프랑스 80여 개 순으로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