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운하의 정치사

수에즈운하의 정치사

수에즈 운하의 개착에 반대한 영국은 막상 운하가 개통되자 태도를 바꾸었으며, 1875년에는 이집트 정부의 소유주를 매입하여, 운하의 경영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영국은 국제적인 요구였던 운하의 중립성 보장과 이를 위한 국제관리안에 반대하였으며, 러시아튀르키예가 전쟁 중인 1878년 5월에는 운하 보호를 이유로 포트사이드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이 해에 국제법학회가 전시에도 교전국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국제 관리를 결의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1882년 6월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반란이 일어나자 그 진압을 구실삼아 운하지대를 영국의 군사기지로 만들고, 며칠 동안 운하 통과를 중지시켰다.

1885년의 7개국 파리회담을 거쳐 영국 등 9개국이 1888년 10월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수에즈 운하의 중립화와 국제화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 조약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운하지대의 군사 점령을 계속하였으며, 1904년의 영국 ·프랑스 협정에서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과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교환 조건이 있은 다음에야 1888년 조약을 비준하였고, 이에 그 조약은 정식으로 발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은 자국의 판단으로 운하를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튀르키예와 독일이 운하 점령을 기도하자, 영국은 1915년에 일시적으로 폐쇄 조치를 취하였다.

그후 영국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따라 1888년 조약 중의 튀르키예의 권한까지를 계승하였으며, 1922년 이집트가 독립을 이룩한 뒤에도 여전히 수에즈 운하에 대한 군사 지배를 계속하면서 운하보호자라고 자칭하였다. 1930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새 조약을 체결할 준비를 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이 시작되자 이를 배경으로 1936년에 서둘러 영국·이집트 동맹조약을 맺고, 영국군의 운하 주둔과 이집트군의 운하 공동 보호를 결정하였다.

아프리카 작전 때문에 운하 사용도가 격증한 이탈리아는 운하의 실질적 국제 관리안을 제창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으로써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독일이 운하회사 파리 이사회를 점령하고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운하의 군사 점령을 계획하자, 영국은 1888년 조약과 1936년 조약을 정지시키고 영국군의 운하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의 반영(反英)운동은 가열되었으며, 1945년에 이집트 정부는 1936년 조약의 개정을 영국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집트는 주식 입수를 통한 점진적 운하회사 국유화를 꾀하였고, 1947년의 새 회사법을 적용하여 1949년에 운하회사와 새 협정을 체결하였다. 1949년의 팔레스타인 휴전 후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행 특정 물자를 운송하는 외국 선박의 운하 통과를 거부하였으며, 운하회사도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이집트인의 운동이 격렬해지고, 운하지대에서는 이집트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빈발하였다.

그러다가 1951년, 이란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 국유화는 이집트의 운하 국유화 운동을 자극하였으며, 1952년에는 나세르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1954년 10월에 나세르 대통령은 영국과 조약을 맺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군은 1956년 6월에 철수하고, 그 해 7월 26일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해 10월 31일에 이스라엘을 선두로 운하 탈환을 꿈꾸는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 점령을 목적으로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고, 운하는 1957년 3월까지 통항이 불가능해졌다.

수에즈 전쟁은 국제 여론을 움직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UN의 결의에 따라 철수하였다. 그후 수에즈 운하는 제3차 중동전쟁이 터진 1967년 6월부터 다시 폐쇄되었다가, 1974년의 이스라엘군 철수로 1975년 6월에 재개되었다. 현재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수에즈운하회사가 관리, 운영하고 있다.